고담 금수사 주지

요즘처럼 말이 많은 세상이 여태까지 없는 것 같다. 중앙 정계의 대선 여야당간의 다른 말들, 재벌들의 목소리, 시민연대의 소리 등등. 그 가운데서도 자기의 이익과 자신을 위한 궤변, 이처럼 억지스러운 말처럼 역겨운 것은 없다.

우리 불교의 세계관 특히 대승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어디에나 진리가 있고 어디에서나 세계가 있으며 어디에서나 부처가 있고 어디에나 중생이 있다고 한다.

기하학에서는 직선에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나란한 것은 하나 밖에 없다고 했다. 즉 1+1=2라는 것이 절대진리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은 공간이 네모반듯한 것이 아니라 공처럼 둥근 것으로 깨닫게 된다. 공처럼 둥근 공간에서는 직선 혹은 평행선이 없다는 것이다. 

적도에서 분명히 두 직선이 나란히 뻗는 것이 두 극, 남극과 북극에 만나지 않는가. 공간은 네모진 상자처럼 생겼거나 둥근 공처럼 생겼다고 한동안 생각했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해 나팔처럼 생긴 공간이 있다는 발견이다.

이 공간은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의 공간으로, 우주의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 현실의 물리학에서는 정설이다. 절대주의자라도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생각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다른 모양의 공간 즉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공간 즉 세계관을 적극 긍정하는 체계가 아인슈타이네 의해 세워진다. 공간을 두고 상자 축구공(원) 나팔처럼 생각한 것은 그때 그때의 방편이지 실제로는 이 같이 일률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현실적인 공간은 달의 표면처럼 울퉁불퉁한 것이며 공간의 종류를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일률적으로 생긴 절대 공간을 부정할 수가 있고 어디에서나 마음대로 공간을 설정할 수 있음을 알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대로 나의 공간 즉 세계를 선정할 수가 있다면 그 세계를 건설하는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얼마든지 만들 수 있기에 아름답고 조화롭게 쓸모 있는 공간 즉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임재선사의 임재록(臨齋錄)에 나오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隋處作主 立處皆眞·어떤 경우에도 나의 중심만 확실하면 바깥세계가 어떻게 변해도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 말을 요약하면 나의 입장만 분명하면 언제 어디서나 진리가 있고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나이 많은 노부모를 버리고 자식을 유기하고, 보험금 때문에 가족을 살해하고 부녀자를 납치 유기 살해하는 그 인간들의 입처는 무엇이며 아름다운 자기만의 공간 즉 세계는 무엇이었는가? 가슴이 답답해진다.

입처개진이라 하지 않던가. 그들은 스스로의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부처님의 사상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부처님은 갠지스강을 건너는 아난존자에게 말한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여기서 건널 수 있고 저기서 건널 수도 있다. 배로 갈수도 있고 헤엄쳐 갈수도 있으며 뗏목으로도 갈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건너가야만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입처(立處)는 사람 각자가 다 다르다. 그러나 도달하는 피안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잘못하면 어디에나 진리가 있고 무엇을 해도 자기 자신이 진실하고 모범된 사람이라는 안일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기에 중생에 대한 자비를 느끼지 않을 때는 위선이 되고 비열한 인간이 될 것이다.

있는 자와 없는 자, 권력자와 일반 서민, 종교인과 비종교인, 우리 모두가 입처를 확인해야 된다. 나를 위한 입처인가, 너를 위한 입처인가? 세상의 모든 중생을 위한 입처라면 강을 건너는 목적지는 모든 사람들의 피안이 될 수가 있다.

입처가 분명하면 삶이 생활이 풍요로워진다. 또한 남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아름다운 공간, 조화롭고 향기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의 진리를 뜻하는 등을 올해는 꼭 밝히기를 바란다. 현실의 모든 사람이 부처님과 같이 되기를 발원하고 이 세상에 사랑과 행복과 지복이 충만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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