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칼럼위원

나는 말(馬)입니다.

경마장에서 기수를 태우고 달리는 경주마입니다. 성적이 어쩠느냐고요? 그동안 96번을 출전 했지만 한번도 1등을 못했습니다. 겨우 3등한 게 최고성적입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1등 한번 못한 나도 참 딱하네요. 1922년 서울에 조선경마구락부가 발족되고 경마가 시작된 이후 최악의 기록이라네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일컬어 ‘똥말’이라고 비웃습니다. ‘똥 같은 말’이라는 거죠. 마주(馬主)는 큰 기대를 갖고 ‘매력적인 소녀’라는 뜻의 ‘차밍걸’이라는 예쁜 이름도 지어 주었는데 이제 똥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5위 안에 들어오면 상금과 배당금으로 맛있는 홍당무에 각설탕도 듬뿍 먹을 수 있지만 언감생심 퇴출 안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사실 다른 말들은 체중이 500㎏ 훌쩍 넘지만 나는 430㎏의 왜소한 몸집에다 나이도 많아 말의 나이로는 여덟 살, 사람으로 치면 마흔 살이 넘은 나이입니다. 거기다가 훌륭한 혈통으로 스펙을 지닌 가계(家系)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꾀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달리는 일 뿐입니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것도 내 장점입니다. 그런 탓에 1등이나 2등은 못했지만 그렇다고 꼴찌대장은 아닙니다. 꼴찌한건 딱 두 번 뿐입니다. 그만큼 열심히 달렸다는 거죠. 지난 5월 26일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96번째 시합을 했을 때도, 그날 출전한 11마리 가운데 두 마리를 제치고 당당하게 9위로 들어왔습니다.

대회가 끝나면 다른 경주마들은 기력이 빠져 한 달 이상 쉬는 게 보통이지만 나는 잔병치레가 없고 튼튼해서 한 달에 두 번 뛴 적도 있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아 수입이야 적지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비록 가진 것 없고 잘난 것도 없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을 닮았다고들 합니다.

그런 탓에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똥말이지만 오히려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루저들의 희망, 나는 행복한 똥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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