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칼럼위원

대마도에 갔다. 그 곳에서 한말 꼬장꼬장한 유학자이며 애국지사였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의 흔적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서른다섯의 나이에 정4품 관직인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된다.

이 직책은 문과 급제자 중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고 청렴강직하며 무엇보다 청빈함을 요구하는 청요직(淸要職)이다.

장령이 되자 맨 먼저 대원군이 추진하던 경복궁 중건의 중지를 건의한다. 이유는 백성들에게 거두는 과도한 세금 때문이었다.

재정 충당을 위해 만든 사대문 통과세(門稅)와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아울러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한다. 이 일로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 되어 제주도로 유배당한다.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자 이를 반대하며 올린 병자지부상소(병자년에 도끼를 짊어지고 올린 상소)는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을사조약이 이루어지자 조약의 무효와 함께 망국조약에 참여한 오적(五賊)의 처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병을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대원군의 미움과 일본군에게는 눈엣가시 같았던 면암을 강제로 대마도에 압송시켜버린다.

도착하여 일본군이 단발(斷髮)을 강요하자 이를 단식으로 거부했고 유배 온지 4개월 후 조선의 선비 면암은 숨을 거둔다.

그의 시신은 백제의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한 이즈하라에 있는 수선사(修善寺)에 모셔졌다가 다음해 1월 부산 초랑부두에 도착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는지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라가 시작된 이래 사람이 죽었다고 이처럼 슬퍼한 적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대마도 관광지도에는 면암의 유적지로 수선사 대문 오른쪽에 세워진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 달랑 하나밖에 없다. 그 비는 놀랍게도 1986년 일해재단에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대마도에 면암의 스토리를 찾아 입히는 작업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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