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칼럼위원

그리스 신화에 한 여신이 도둑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올림포스 산에서 쫓겨났다. 여신은 수치스러워 끝내 자결했고 그 무덤에 꽃으로 피어난다.

사람들이 자기를 건드리기만 하면 씨주머니를 퍼뜨렸다. 죽어서도 자기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의 속을 다 들어 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봉숭아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또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 마세요'다.

'봉숭아'의 추억은 손톱에 물들이는 일이다. 조선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의 ≪임하일기(林下日記)≫에 '봉숭아꽃이 빨갛게 피면 그 꽃잎을 따서 짓찧어 백반을 섞어 손톱에 싸매고 사나흘 밤을 지나면 손톱이 빨갛게 물든다. 무당들뿐 아니라 아이들한테도 손톱을 물들이게 하는 것은 아름답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병마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적색기속(赤色奇俗)'은 모든 생활에서 깊이 뿌리내려 있던 양귀법(禳鬼法:귀신을 쫓는 주술방법)의 하나였다.

손톱에 꽃물들이던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충선왕과 궁녀의 일화로 보아 퍽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고려 26대 충선왕이 원(元)과의 통혼정책에 따라 원의 공주가 왕후가 됐지만, 조비를 더 사랑하자 질투한 공주가 친정에 알려 왕은 원나라로 압송된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왕의 꿈속에 한 소녀가 가야금을 타는데 열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상하게 여겨 다음날 궁녀들을 불러 모았더니 한 궁녀가 봉숭아 꽃물을 들인 열 손가락에 흰 헝겊을 동여매고 있었다. 고향의 풍습을 잊지 않은 소녀를 기념해 훗날 고국으로 돌아 왔을 때 온 나라에 봉숭아를 심게 했다고 전한다.

6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꽃이 피는데 가을에 물들인 봉숭아 꽃물이 크리스마스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속설로 소녀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이제는 매니큐어에 밀려 손톱에 꽃물들이던 모습은 그리움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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