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새터민 박영도와 결혼이민자 '머나'의 결혼이야기

목숨 건 탈출, 중국 길림성 정착
몽골주재 대사관 통해 대한민국 품으로.....
올해 마흔 세 살의 떡거머리 총각 영도 씨 고향은 함경남도 덕성이다. 지금은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사내에 있는 유림ENG 사원으로 근무하며 마전동 대우조선해양 기숙사에 살고 있다.

"지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영도씨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터민'이다. 그가 31세 되던 지난 2000년 북한을 탈출했다. 85년부터 5년간 북강원도 철원에서 군 복무를 했던, 그 누구보다 북한체제를 옹호하고 정신무장이 철저했던 그가 탈북을 결심한 동기는 '끼니걱정' 때문이었다.

영도 씨는 김일성 생전까지는 그나마 사정은 나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1994년 이후, 북한경제는 가파르게 나빠졌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영도씨는 미련없이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목숨을 건 그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경계가 허술한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젊은 사내 영도씨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쉬웠다. 하지만 더 큰 어려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러운 무국적의 도망자를 더 슬프고, 아프게 한 것은 같은 민족(조선족)이었다. 손발이 닳도록 일해도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안에 신고하겠다는 협박을 당했다.

"북한에 있는 여섯형제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잡히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당시 영도씨의 좌우명이었다. 그래서 인지 그는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2001년 한족 지주 집 노동을 갔다. 밤 작업이었다. 그날 그는 노동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

그날 밤 영도 씨와 함께 했던 35명의 친구들이 공안에 끌려가 강제 송환됐고 그들의 소식은 아직도 모른다.
자유를 일깨워 준 '한국방송'.

영도씨의 행운은 이어졌다. 지난 2006년부터는 길림성 도로관리국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날품을 팔았다.

그리고 한국방송을 듣기 시작했고, 그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호의적인 중국인 사장의 도움이 컸다. 2008년 10월 24일 몽골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았고 그렇게 그는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눈물은 사치, 이제 부터가 시작"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지만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눈물은 그에게 사치였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새터민 재활시설인 '하나원'을 나와 대구광역시에 있는 '용접학원'에 입학한 것은 2009년 2월. 6개월 동안 그는 이곳에서 자격증을 따고 친구들을 만났다. 거제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접학원 원장의 소개로 영도 씨는 남해안의 아름다운 섬 도시 거제, 세계 제일의 기업 대우조선해양의 일원이 되었다. 거제를 처음 만났을 때, 대우조선소를 만났을 때 그는 탄성 이전에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이렇게 큰 조선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2009년 9월 유림ENG에 입사했다. 힘든 노동이었지만 일한 만큼의 대가는 담보됐다. 일이 즐겁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한 눈을 팔 시간은 없었다. 영도 씨는 거제 정착 4년차를 맞이하지만 거제시의 지리를 잘 모른다. 어렵게 얻은 자유, 힘들게 얻은 일, 결코 놓칠 수 없었기에 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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