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칼럼위원

남부러울 것 없는 노인부부가 있었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잘나가시던 분이라 할머니는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았다.

어느 날 여고동창모임에 갔다 오시더니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보다 못해 영감이 "와 니보다 옷 잘 입은 친구 있더냐?"고 물었다. "아니." "그럼 누가 자식 자랑하더냐?" "아니" "그럼 니 와그라노?"하고 자꾸 물었더니 한참 만에 할머니가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이 "아직 영감 살아 있는 건 나밖에 없더라"고 말했다.

직장에 오래 다닌 사람이 그만두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우울증 증세를 '은퇴증후군'이라 한다면, 퇴직하여 집에서 빈둥거리는 남편을 쳐다보며 겪는 아내의 우울증 증세를 '은퇴한 남편 증후군'이라 한다.

평생을 몸 바쳐서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고 옆도 안 돌아보고 살았는데, 은퇴하고 나면 찬밥신세가 되는 불쌍한 우리 아버지들을 조롱하는 닉네임이 많다.

'거실남'이나 '파자마맨'은 그나마 애교가 묻어 있지만,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하는 '삼식(三食)이'는 눈물날 일이다.

아내들도 할말 있다. 지금까지 애들 키운다고 내 할일도 못했는데, 이제는 자식 다 키워놓고 나니까 늙어 남편 돌봐야 한다니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1,2년도 아니고 요즘은 평균수명이 길어져 은퇴 후 30~40년을 놀아주고, 밥해줘야 하는 귀찮고 성가신 일은 그만하겠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고령화 사회의 국민인식 조사'에서 여성의 71.8%가 '늙은 남편 돌보는 일이 부담스럽다'고 한 대답이 바로 남자들의 현주소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은퇴한 남편을 '젖은 낙엽'이라고 한다. 젖은 낙엽은 빗자루로 쓸어도 바닥에 딱 붙어 쓸리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드디어 여성들은 남자가 퇴직하기 바쁘게 '황혼이혼'을 준비한다. 남편의 연금을 최대 50%까지 가져갈 수 있는 제도가 생기면서 돈도 챙기고 젖은 낙엽도 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불쌍한 우리네 아버지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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