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잘 잤는가?” 치열한 삶과 따뜻한 인정 한 가득

새벽 5시50분 남부면 쌍근마을 출발해 1시간여 만에 고현 도착

손발이 시리도록 차가운 새벽 공기.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내버스정류소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첫 차를 기다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서민들은 그들의 애환만큼이나 구불거리는 길을 뚫고 삶의 터전으로 향한다.
새벽을 헤치는 시내버스에는 그들만의 치열한 삶과 아직은 살 가운 시골사람들의 순박함이 훈훈한 온기를 만들어 낸다.
새벽을 뚫고 버스가 간다

지난 4일 어둠이 자욱한 남부면 쌍근마을. 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던 시내버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었다.

새벽 5시50분 쌍근에서 출발해 탑포, 율포, 거제면, 사곡 등을 돌아 고현으로 향하는 첫 시내버스가 출발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것만 같은 새벽시간, 차가운 겨울 바람을 뚫고 탑포마을에 도착하니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두 명의 할머니가 버스를 맞았다.

“어제는 허들시리 추웠는데 오늘은 날이 마이 풀릿네.”   봇짐을 한가득 들고 힘겹게 버스에 오른 두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오늘의 첫 손님들이다. 구불거리는 비탈길과 오르막길을 지나던 시내버스가 이내 멈춰 섰다. 3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를 태웠다.

“할매요, 잘 들 주무셨지예.”  익숙한 얼굴인 듯 할머니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율포마을에 도착하니 꽤 많은 사람들이 승강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목도리와 면장갑으로 중무장한 할머니와 할아버지, 젊은 아주머니가 서둘러 버스에 올라탄다.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얼굴을 보자마자 말부터 건낸다. 버스 안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졌다.

“어데 간다꼬 이리 일찍 버스를 탔소?” “거제장에 떡국거리 뺄라고 간다아입니꺼, 쫌만늦게 가도 많이 기다리야 해서 첫차 타고 갑니더.”

어느새 손님들로 가득 채워진 버스 안. 반가움과 안부를 묻는 말들이 엔진소리를 뚫고 이어진다. 조용하던 버스 안이 이내 얘기꽃으로 가득해졌다.

아직도 정은 살아있네

시내버스가 출발한지 30여분이 지났다. 차량은 어느새 동부면 동호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6시17분. 어느덧 한가했던 버스가 새벽 손님들로 가득했다.

빈자리가 없어 서서가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반대편 차선에서도 차량들의 불빛이 간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리는 손님은 없어도 타는 손님들은 줄을 이었다.

“어머이, 내가 차비 냈응께나 고마 타이소.”

동부면에 도착하자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버스에 먼저 오르며 뒤따르던 할머니를 보고 말한다.

“아이고, 내가 낼 낀데 만다꼬 니가 내고 그라노”.  할머니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앉아서 갈 자리가 부족했지만 이내 “할매요, 이리 와서 앉으이소”라며 할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삼성작업복을 입은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맙소, 거제면까정만 앉아 가께”라며 할머니가 자리에 앉았다. 웃어른을 공경하는 훈훈한 시골인심이 새벽을 달리는 버스안에는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스피커를 타고 노사연의 노래 ‘만남’이 잔잔히 흐른다.  
 

보따리에 사연 한가득 담아

6시30분 거제면에 도착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절반 가량이 거제면에 내렸다.

하나가득 짐을 들고 탄 사람들이 많아 제법 오랫동안 승강장에 머물렀다.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차창가로 어느덧 멀어진다.

오수마을에 도착하자 한 할머니가 커다란 짐봇다리를 이고, 지고 버스에 올랐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는 고현에 물건을 팔러 간다고 말했다.

올해 일흔셋인 유영희 할머니였다. 어제 솔섬에서 딴 싱싱한 파래를 고현장에 가져간다는 할머니는 앞뒤에 타고 있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할매가 너무 욕보고 삽니더, 동네 사람들이 다 안다 아입니꺼”라며 옆자리에 타고 있던 아주머니가 말한다.

2-3일마다 첫차를 타고 고현으로 향한다는 할머니는 지난 1997년 아들이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자 그때부터 파래와 미역, 조개 등을 고현시장에 내다 팔고 있었다.

“오늘은 파래가 싱싱해서 억수로 좋다 아이가, 빨리 다 팔아삐고 일찍 넘어왔시모 좋겄소.”
주름 가득한 얼굴과 굽은 허리, 굵은 손마디가 모진 세월의 풍파를 대변하고 있었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

6시40분, 사곡삼거리에 도착했다. 삼성복을 입은 근로자들과 고현 시장에 물건을 팔러가는 할머니, 봇짐들로 버스가 만원 아닌 만원이다.

구불구불 이어지던 시골길을 빠져 나와 국도14호선에 들어서니 멀리 조선소 불빛이 훤하게 비쳤다.

어둡던 하늘도 조금씩 밝아져 흐릿하게 보이던 건물들이 점점 또렷하게 다가왔다. 버스안 사람들도 졸고 있는 이가 많아졌다.

10여분 남짓 지나 장평에 도착했다. 곤한 잠에 빠져 있던 근로자들이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마지막 종착지를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 정류장인 고현시장에 도착했다. 짐이 많은 할머니들이 힘을 모아 물건들을 내렸다.
몸집 만한 큰짐들이 힘에 겨워 보였지만 할머니들의 뚝심은 대단했다. 버스에서 내린 할머니들 뒤로 새하얀 달빛이 비친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새벽 첫 차를 운전한다는 윤성욱(42) 세일교통 기사는 “매일 출근 도장을 찍듯이 첫 버스를 타는 할머니들이 많다”면서 “나이도 많은데 장사를 위해, 먹고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안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시간, 모두가 쉬는 일요일이지만 첫차를 타고 새벽을 여는 이들은 치열한 삶만큼이나 뜨거운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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