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칠 화평교회 목사

2~30년 전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 유세전은 선거 결과 못지않게 관심이 많았고 당시 유명 후보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모인 인파가 어찌 많았든지 어떤 때는 몇 십만이 되는 구름 같은 인파가 모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들이 다 무엇 하러 왔더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유세장에 왔으니까 유세를 들으러왔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양상이 한국교회사에도 있었는데 당시가 서울의 대형교회들이 처음 등장할 때였다.

마침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혹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호기심 반 진심 반으로 그런 대형 교회를 찾아가 예배드리기도 했었는데 거기에 갔다 온 사람의 대부분이 위에 말한 유세장을 찾았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질 않았던 것인데, 그들의 첫 번째 관심사가 교인의 숫자였고 다음은 건물의 규모였다.

주님께 책망 받은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만나러 간 사람들도 있었다. 근간에 일어난 일본의 대지진에 대해서 어떤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 매스컴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있었다. 왜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같은 값이면 위로와 축복의 말을 해야지 왜 하나님의 경고라는 기분 나쁜 말을 하느냐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아마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대형 교회의 목사님이면서 또 한국 교회를 대표할 만한 분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런 경우엔 당연히 사랑의 말 위로의 말 축복의 말로 감싸 주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만나러 간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항상 좋은 말만 듣기를 원한다. 긍정적이고 칭찬하고 축복하고 위로만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선지자는 어떤 사람인가?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준비 시켰던 사람이 선지자였다. 심지어 예수님 시대의 선지자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이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는 직설적인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세례 요한뿐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다 그러했다.

그들은 재난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가르쳤고 환난에 대해서는 그 또한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가르쳤던 사람이 선지자였지, 그것은 뒤로하고 감언이설로 위로나 하고 격려나 하고 축복이나 한 사람을 성경은 도리어 삯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기억할 것은 부드러운 말만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을 해 보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과연 세상에서는 무엇을 보았고 교회에서는 무엇을 보았더냐?는 것이다. 갈대만 보지 말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 보러 다니지도 말고 그 속에서 선지자라면 무엇이라 말 할런지 삼가 듣는 지혜가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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