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돈묵 거제대학 교수

매년 이맘때면 눈밭을 헤매며 열병을 앓는다. 서재에 앉아 책을 펴도 마음은 어느새 내 곁에 없다.

유년의 뜰에 나가 있는 소년은 나이답지 않게 애어른이 되어 있다. 마냥 좋다며 눈 속을 뛰는 철없는 아이가 아니다. 가족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환한 얼굴을 그리며 산에 오른다. 엊그제 설치한 토끼 올가미 하나하나 점검해 간다. 이것은 소년이 등교하기 전에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다.

소년은 산등허리를 타고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맞는다. 건강하다. 눈이 덮힌 하얀 산처럼 그의 가슴에는 깨끗함만이 존재한다. 순수함만이 가득하여 무한의 세계가 가능하다. 그렇게 꿈을 키우며 살았다. 그 눈밭은 소년에게 꿈의 텃밭이었다.

대보름날이다. 아침부터 마음이 설렌다. 손에 든 영이 심상치 않다. 엊그제부터 이틀에 걸쳐 만든 연이다. 그 동안 띄우던 연과는 다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전에처럼 바탕이 흰 종이가 아니다. 그림도 그렸고, 떨치고 싶은 액운과 소망도 기록했다. 물론 자신의 이름도 큼지막하게 썼다. 적힌 내용이 애늙은이 사고로 가족에 닿아 있다.

마지막 점검을 한다. 대오리는 잘 붙었는가. 연의 균형은 맞는가. 모두 확인 후엔 마지막으로 연줄에 솜을 단다. 솜에 살짝 석유를 묻힌다. 연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폼이 의기양양하다. 가족의 모든 안위를 책임진 가장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 있다.

연을 날린다. 매달린 솜덩이에 불을 붙이고 연줄을 풀어준다. 언덕 위에는 겨울바람이 세다. 연은 하늘로 오른다. 높이 오른다. 연줄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 온다. 그 줄을 쥐고 소년은 자신의 호흡을 조절한다.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긴장감. 저 하늘 높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은 더 높이 오른다. 소년의 마음이 초조해진다. 바로 있을 떠남을 아는 탓일까.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긴장한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액운을 함께 보내야 한다. 연에 차마 적지 못한 사연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툭! 소리가 감각이 되어 소년의 뇌리를 스친다. 모든 액운이 날아간다. 몸이 한결 가볍다. 다시 소년은 들판을 가로질러 연을 따라 달려간다.

산에서 토끼몰이를 하다가 누군가 띄워 보낸 연을 줍는다. 매가 잡아 숨겨둔 꿩을 주운 기분과 너무나 흡사하다. 거기에 쓰인 사연을 본다. 자신의 것인 양 그렇게 다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이 연을 보낸 사람은 어디에 살까? 몇 살이나 될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몇 밤을 설치며 그리움으로 키운다. 그 연의 사연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내가 혼자 사랑하는 사람의 것인 양 가슴에 담아 늘 그리워하며 산다. 주운 연의 사연은 소년의 가슴에서 그리움으로, 사랑으로 부피를 더해 간다. 문득 자신이 떠나보낸 연이 그립다. 내 연은 누가 주웠을까? 많이 궁금하다.

유년의 뜰을 뛰어다니는 아이의 옷소매를 잡아당겨 책상 앞에 앉힌다. 소년은 어느새 어른인 내가 된다. 내 아이들에게는 왜 이런 꿈의 동산을 제공하지 못 했는가. 자책이 인다. 내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내 아이들은 주운 연에 대한 그리움을 어디서 찾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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