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이 정말로 못 먹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나이가 사 오십 정도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에도 가난한 우리의 부모들은 자신들은 못 먹고 못 살아도 아이들 공부는 가르쳤다. 그것이 그 시절 우리 서민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가난이 대물림 되지 않게 하는 기회였다.

그래서 그 때는 못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가난한 부모들은 그들의 가난이 대물림 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부자 앞에서도 당당했던 것은 그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는 공부 잘하는 자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가정은 핵가족화 되었고 경제 상황도 좋아져서 대부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먹고 입는 것은 물론이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힘닿는 대로 해준다. 아이들은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진다.

그들이 필요한 것이 입 밖으로 채 나가기도 전에 자녀를 위해 교육적, 경제적 지원을 다 하기로 결심한 그 부모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한 교육적으로 좋다는 온갖 것들을 다 준비해 놓고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바뀌었다. 그러나 변화는 비단 물질적, 경제적으로만 온 것은 아니다. 기억해보시라. 우리가 학교에서 몽둥이로 엉덩이가 시퍼레지도록 맞고 와도 우리 부모님들이 어디 밭일을 내팽개치고 학교로 달려가 교사의 멱살을 잡은 적이 있었는가. 억울하게 맞아도 오히려 우리 부모들은 "선생님이 다 그럴만해서 그랬겠지"라며 오히려 우리들을 나무랬다.

그러나 오늘날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학교에서 교사에게 맞은 엉덩이를 보여주면 어떻게 하는가. 바로 사진 찍고 컴퓨터를 켜서 홈페이지에 올리고 그것도 부족하면 다음날 서슬이 퍼런 얼굴로 학교를 찾아가 아이가 당한 것을 똑같이 하지 않는가.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자식을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손을 대냐, 애들이 말 안 듣고 떠들고 반항 할 수도 있지 않냐, 좋은 대화 놔두고 왜 애를 때리느냐.

그럼,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세상에 먼저 말로 훈계하지 않고 매부터 드는 교사는 없다. 매를 들기까지 아마도 수 십 번은 더 지적하고 훈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집에 가서 절대로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자기는 별로 혼날 일을 하지 않았는데 불이익을 당했노라고 자기 방어를 한다.

아이를 과잉보호하는 것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것이다. 헝그리 정신이 없는 아이들은 점점 더 부모에게 의존하게 되고 세상에 부족한 것이 없으니 애써 뭔가를 이루고 성취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그리고 어찌 어찌 살아가다보면 부모가 해 주겠지 하는 생각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간다.

당신의 자녀를 무능력하고 도전 정신이 없는 젊은이로 키우고 싶으면 과잉보호를 하라.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어려움에 직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 인간관계에서 괴로워해보고 상처도 받아보고 또 억울하거나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서 세상을 배워가는 아이가 건강한 아이다.

때로 아이가 썩 필요하지도 않은 뭔가를 사달라고 조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고집을 못 꺾어 당장 마트로 달려가 아이의 필요를 채우지는 마라. 그러면 아이는 물건 귀한 줄도 모르고 경제관념도 희박해진다. 기다리게 하고 그 물건을 가지기 위해 무언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신발장 정리라도 시켜라.

과잉보호는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당신이 과잉보호하며 키운 아이는 성마르고 성취력 부족에 의지력이 부족하고, 매우 나약하며 헝그리 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평생 당신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당신의 십자가가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의 부모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오늘 당장 아이의 말에 무조건 장단을 맞추고 아이가 학교에서 맞고 오거든 뽀르르 학교로 달려가 선생 멱살을 잡고 늘어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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