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치돈 본지 칼럼위원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25전쟁이 발발한지도 벌써 60년이 흘렸다.

천안함 침몰 이후 UN 안보리에 이 사건의 회부를 놓고 한반도가 긴장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천안함 사건의 계기로 전쟁의 의미와 왜 전쟁이 일어나는 지를 한번쯤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보자.

월드컵 16강 진출에 대한 지대한 우리들의 바람으로 인해 우리가 체감하는 긴장상태는 다소 주춤하는 듯 하지만 남북의 외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전쟁과 전쟁이 없는 기간으로 구분할 수 있고 전쟁이 없는 기간을 평화의 시기라 말하지만 사실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비하는 전쟁준비 기간이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은 난폭한 스승이다'고 했고, 헤겔은 역사는 전쟁을 통해 발전하며 이 역사의 현장은 '피로 물들인 도살장'이며 전쟁을 'march of God'(신의 행진)으로 표현하였다

필자는 칼 폰 클라우스비치의 '전쟁은 수단을 달리한 정책의 연속이다'라는 정의를 따른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적을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키려는 무력사용행위로서,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따라서 전쟁이란 기대되는 이익과 예상되는 비용을 계산하는 국가지도자들의 의식적 결정의 산물이다.

두 국가가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서로 대립하고 양국이 모두 승리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나마 낙관한다면 전쟁이 이미 잉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국제관계의 구조적 측면을 'Blance of Power'(힘의 균형) 이론을 통해 전쟁의 원인을 찾는다면 대립하는 국가세력간의 힘의 균형이 파괴된 상태가 전쟁을 일으킨다고 본다

하지만 힘의 균형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의 균형을 관리하는 지혜로운 지도력(독일의 비스마르크나 영국의 캣슬레에 수상 같은)이 수반 되어야 한다.

또한 전쟁의 원인을 국내정치의 불만을 외부적 관심을 통해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전쟁을 선택한다는 '속죄양 이론'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결국 전쟁은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이 누가 국가지도자인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지도자의 정책결정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된다. 물론 국가지도자가 전쟁이라는 정책결정을 함에 있어 국내적 정치 상황, 군사력의 정도, 국제체제의 힘의 분포,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욕망 등을 고려할 것이다.

구조적으로나 역사상 필연적으로 반드시 일어 날 수밖에 없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시기와 상황에 누가 정책결정자인가에 따라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 한반도의 전쟁은 남북의 정치지도자의 결정만이 아니라 우리주변을 싸고 있는 4대 강대국의 정치지도자들의 결정이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하다.

이 복잡함으로 인해 오히려 전쟁이라는 결정이 쉽게 이루어 지지 않고 전쟁을 억제하는 효과가 생기는 반면 우리의 자주적 의사와 상관 없이 전쟁이 결정될 수 있다는 비극적인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우리 국민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길은 6자회담에서 현명한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이론들에 입각하면 6자회담 당사국의 정책결정자들이 바로 한반도에서 전쟁이라는 정책결정을 하는데 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말처럼 역사란 만장일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스마르크는 역사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자만이 역사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국내지도자가 무엇이 한반도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역사의 발자국 소리를 잘 듣기를 바란다. <변호사>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