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두 사람이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늘의 많은 별들을 본다. 똑같이 물이 든 컵을 보지만,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반밖에 안 남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나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이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한 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이런 불확실한 현실은 슬픔의 한숨이나 두려움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이런 불확실한 현실은 벅찬 기대로서 표현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이 땅 어디에서도 확신하며 살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세상이 다 변할지라도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동일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항상 미쁘신" 분으로 표현한다(딤후2:13).

믿음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가 갈 곳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또 그가 가는 길에 어떤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비록 그가 가는 길은 불확실했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죽고 온 백성이 실의에 차 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이 백성과 함께 일어나서 요단을 건너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 하셔서 형통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가 가는 길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일어났다. 하나님은 세차게 흐르는 요단강을 멈추게 하셨다.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아합왕 앞에 나타나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선포한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은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하여 먹여주셨다. 매일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기다려야 했던 엘리야는 까마귀가 언제까지 먹을 것을 가져다줄지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굶기지 않으셨다. 까마귀는 불확실했지만 하나님은 확신할 수 있는 분이셨다. 점점 말라가는 시내를 바라보면서 또 불안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번에는 엘리야를 사르밧의 과부에게로 보내셨고, 거기서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엘리야를 돌보셨다.  우리의 현실은 불확실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불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확실하기에 불안해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내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해 가실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확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마침내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확실성에 대한 이런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 가시는지 기대하자.

우리의 불확실한 미래는 더 이상 우리에게 슬픔이나 불안, 두려움이 될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함을 믿기에 우리는 항상 기대와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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