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갑생 부산경남사학회 연구원

무인정권은 강력 몽고의 침입, 즉 외적인 요인으로 파멸되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적 변동기에서 마지막으로 무인정권의 수호를 위하여 분투한 사람들이 삼별초다. 그들은 무인정권의 유지·존속을 위하여 싸웠지만 한편 외적의 침입에 굴하지 않는 고려 무인의 정신을 발휘해냈다.

그들은 원종을 중심으로 한 항복파를 따르지 않고 따로 자기들의 왕을 세우고 끝까지 몽고에 항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강화도에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불리하였다. 삼별초를 통솔한 배중손 등은 그들이 새로 세운 왕을 모시고 전남 진도로 남하하여 진도를 도읍지로 삼고 전남·경남의 여러 섬들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옛날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하였듯이 삼별초도 해상권을 장악한 왕국을 건설했다. 특히 남해에는 삼별초의 중견이 되는 유존섭이 있으면서 진도와 맞붙어 창선 거제 등의 섬들을 점령하고 연안 해변에 나타났다.

이처럼 삼별초는 거제도 전역을 지배하면서 그 위세를 떨쳤다. 이런 상황에서 원종은 몽고와 결탁하여 김방경의 관군과 몽고군의 연합군 등이 합세하여 삼별초 항쟁군을 굴복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몽고연합군에 밀린 진도의 삼별초는 김방경 흔도 등에 의하여 진압됐다. 그러자 삼별초의 부장인 김통정은 다시 남은 군민들을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가서 끝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김방경과 흔도의 여몽연합군의 재차 공격을 받고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항쟁을 일으킨 지 4년만인 원종 14년 4월에 진압되었다.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간 뒤에도 배로서 경남 연해안과 섬들에 와서 횡포한 짓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삼별초의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들어간 몽고 군사는 여기에 오래 머물러서 그 풍속·습관·언어 등을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삼별초의 항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에서 반외세(反外勢), 몽고투쟁(蒙古鬪爭)의 긍정적 측면과 무신정권의 기반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좀 더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가지고 냉철하게 판단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전은 몽고의 반침략투쟁(反侵掠鬪爭)으로서 나라를 예속화(隸屬化)하려는 정부의 태도에 대하여 반대하는 반몽적(反蒙的) 성격으로서, 또 몽고에 투쟁해 자주성을 보여주는 민중저항정신을 대변한 민중적(民衆的) 성격으로서의 의의(意義)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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