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갑생 부산경남사학회 연구원

고려 1128년(인종 6) 4월∼10월 사이 송변현과 아주·명진 속현에 속한 '해적'인 좌성(佐成) 등 820명이 거제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저항세력의 수장인 좌성은 거제현의 성씨도 아니고, 거제지역사회의 토착세력 출신도 아니었다.

이들은 중앙정부에 위협될 정도였을까. 신하들이 좌성 등의 귀순을 보고 인종에게 하례할 정도로 얼마나 강력한 저항활동을 벌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거제현은 고려시대 12조창 가운데 경상도의 사천과 합포에 각각 위치한 통양창과 석두창이나 그 해상 운송로와 인접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이들은 경상도 남해 연안 지역에 위치한 조창과 조운로를 공격하여 세곡의 운송을 방해하면서 국가 재정운용이나 관료들의 경제생활에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이처럼 거제의 속현들은 중앙정부와 저항할 수 있는 힘과 반감을 깊이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중부의 난으로 피신해 온 의종이 3년 동안 안전하게 지낼 수 있고, 1173년(명종 6) 6월에 김보당 등과 함께 경주로 옮겨 갈 때도 거제 현민들이 저항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거제 현민들은 중앙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거제 현민들이 삼별초 항쟁 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혹은 협조한 사례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저항의 섬, 삼별초 항쟁 참여, 의종·명종 이후 권신이 집권하면서 날쌔고 굳센 군졸은 모두 삼별초에 속하였다. 쉽게 말하면 특수부대다.

삼별초에는 좌별초·우별초·신의군(神義軍, 고려 사람으로 몽고에 잡혀갔다가 도망온 자들로 신의군을 삼음)을 말하는 것으로 야별초(夜別抄, 최우가 나라 안에 도록이 많으므로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찰하게 하여 그를 단속하였는데 그 이름을 야별초라 함)가 점차로 크게 되어 좌별초·우별초로 나누어지고 마침내 신의군을 조직하여 이루어졌다.

강화도로 천도한 뒤에는 이들이 주로 몽고별의 방위를 담당했다.

그들은 최씨 무인정권의 수족으로 움직이다가 최씨의 무인정권이 몰락하자 그 뒤를 이어 임연이 이들을 장악하고 임씨가 또 몰락하자 60년여 간의 무인 집정 체제가 허물어지고 정권이 왕에게로 옮겨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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