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원 본지 칼럼위원

얼마 전 시간을 내어 잠시 베트남엘 다녀왔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약 4시간 반 정도를 날아 호치민 공항에 내린 것은 늦은 밤이었다. 베트남의 인상이 그러하듯 공항의 밤은 다소 초라하고 마치 우리의 70년대 전후를 보는 듯한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밤인데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밖의 풍경은 먼지 낀 가로수와 건축 중의 건물들로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여전히 가난이라는 냄새가 잠시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문득 과거 베트남 전쟁 때 우리가 그들에게 한 일을 그들이 기억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더구나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동안 허름한 호텔에 닿았고, 전력사정이 좋지 않은지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 속에서 첫 밤은 깊어 갔다.

다음날 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국민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과거를 기억하기 보다는 미래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과 급한 성격과 훌륭한 손재주와 근면한 생활태도 등은 한국인과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나라에서 한국인과 한국기업이 우대 받는 것은 대우그룹의 전 회장인 김 우 중씨의 역할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김 우 중전 회장은 베트남 개발사업의 국가적 자문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베트남에 진출한 많은 기업들이 그의 도움을 받고 있고, 자신도 베트남에서 재기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또한 거리를 다니는 대부분의 차들은 낯익은 우리나라의 차들이고, 한국어를 배우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과 그들의 손에 들려진 한국산 핸드폰 등을 보며 '한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감동을 받은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긍지가 아니라 호치민 기념관에서 들은 지도자로서의 호치민(胡志明)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이 최우선의 가치라고 생각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3가지 이상의 반찬은 밥상에 올리지 않았고, 손수 물고기를 길러 혁명의 동지들에게 접대하고 했다한다. 그의 침실에는 작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진, 다른 방에는 낡은 식탁이 전부였다. 부유함과 권위적인 모든 것들을 버린 지도자였기에 지금도 베트남인들은 그를 보기위해 아침부터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다.

1890년 5월 19일에 태어나 1969년 9월 3일에 세상을 뜰 때 까지 그는 오직 베트남만을 위해 살았기에 바딘광장에는 5시 19분에 국기를 게양하고 9시 3분에 국기를 내린다는 것이다.

윌리엄 j, 듀이커의 '반은 레닌이고 반은 간디'라는 호치민에 대한 평가는 그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인도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사후에는 화장을 하여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에 골고루 자신의 뼈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하였지만, 베트남인들은 그를 영구보존키로 하고 방부처리 후 유리관 속에 넣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리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살아서는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자신을 바쳤고, 죽어서는 베트남인들이 먹고 살도록 자신을 내어 주었다.'

'박호(호 아저씨)'라고 베트남인에게 친근하게 불리어진 그의 삶을 독려하기 위해 주었다는 러시아제 승용차가 허름한 진열공간에서 살아있는 역사의 한 부분을 보여 주는 듯이 서 있다.

작고 왜소한 체구, 검소함, 겸손과 친근함, 그리고 끈기와 강인함, 민족에 대한 사랑등은 그의 사후에도 그곳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지도자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그들의 철천지원수 같았을 한국인에게 과거를 잊고, 한국을, 그리고 한국인을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꾸 부끄러워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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