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배 칼럼위원

지난 2월 14일은 2010년 경인년(庚寅年)의 우리의 '설날'이고 또한 서양 풍속으로써 매년 2월 14일에 기념되는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라는 '성 밸런타인데이(Saint Valentine's Day)'이다. 동서양 명절이 겹쳐서 젊은이들은 갑절로 즐거웠을지 모른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일 년 중 설날과 추석은 아이들이 가슴 설레도록 기다려지던 날이다. 명절이 되면 새 신을 신고 새 옷(가난한 집안에서는 때때옷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을 얻어 입을 수 있었다,

게다가 쇠고기 국과 흰 쌀밥에 맛있는 반찬이랑 평소에는 귀한 떡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할라치면 세뱃돈을 받았고 그것을 복주머니에 넣는 순간의 기분은 마냥 기쁘기만 했다.

세뱃돈을 받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러 나가면 새 옷으로 단장한 여인네들의 널뛰기가 한창이고 남정네들은 새파란 하늘에 가지각색의 연을 날리고 있어 아름답기도 하고 풍성한 날이기도 했다.

정월대보름(음력 1월 15일)이 되면 온 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들판에 나와 쥐불놀이 가 한창이었고, 들판 한가운데 달맞이를 위해 마련한 달집태우기는 동네 농악과 어우러져 참으로 흥겨웠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한갓 동화(童話)나 전설(傳說)처럼 아스라이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 그때와 같이 세상사는 맛이 물씬 풍겼던 전통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지난 설날 오후 늦게 중국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로부터 설 인사 전화가 왔다. 이웃에서 밤새도록 시끄럽게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에 밤새 잠을 설쳐서 늦잠을 잤기 때문이라고 하니, 거기는 아직도 설날이면 왁자지껄한 모양이다. 하기야 그들은 설날(중국 사람들은 설을 춘절(春節)이라고 한다) 휴일이 우리보다 훨씬 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막상 설날의 낭만이 퇴색되고 있으나 막상 지구 건너편 미국(美國)에서는 아시아의 설날이 제 이름을 찾아가고 있다니 다행이다.

2010년 2월 12일 저녁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음력설 메시지(Lunar New Year Greetings)'를 발표하면서 "미셸(아내)과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과 아시아인들, 그리고 '음력설(Lunar New Year)'을 쇠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따뜻한 인사를 전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지난날에는 미국에서 설날을 중국의 새해(中國新年)란 의미로 'Chinese New Year'로 불렸는데, 오바마의 메시지에 4차례나 등장하는 'Lunar New Year'라는 표현은 한국 교민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명칭이 바뀐 것이라고 중국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가 보도했다고 하니, 망향의 그리움을 가슴 깊이 안고 사는 우리 교민의 애틋한 심정이 고맙고, 또한 중국의 설날을 우리가 빌려 쓰는 것 같은 찜찜함에서 벗어나 설날을 함께 쇠는 아시아인들이 비로소 '중국의 설날'이 아닌 '우리의 설날'이 된 것 같아서 한결 후련한 느낌마저 든다.

헌데 왠지 명절에 쓸쓸해 할 이웃들이 눈에 밟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추위에 외로이 떨고 있을 노숙자(露宿者)들이 머리에 떠오르고, 6·25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북(北)에 남겨두고 피난 와서 영영 고향으로 갈 수도 없고 가족을 만날 수도 없는 실향민들이 애처롭게 여겨지고, 배고픔과 억압에서 탈피하고자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사선(死線)을 뚫고 넘어온 가족과 헤어진 탈북민(脫北民)들이 측은히 여겨지고, 자식이 없든지 있어도 쓸쓸히 설을 쇨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고독이 뼈에 사무치게 서러울 독거노인(獨居老人)들의 모습이 자꾸만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오는 것은 왜일까.

어느 화가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자 했다. 먼저 개선장군(凱旋將軍)을 그려봤다. 아닌 것 같다. 아리따운 젊은 남녀가 백년가약을 맺는 결혼광경을 그렸다.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드리는 모습을 그렸다. 그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바로 가족이 함께하는, 그리하여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기도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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