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칼럼위원

제주도 '올레길'을 시작으로 각 지자체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린 '둘레길' 열풍이 불고 있다. 길은 세상과의 소통이며,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도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찰과 세상에 대한 이해다. 네 발(자동차)로는 볼 수 없는 세상을 두 발로 걸으며 놀며 쉬며 느끼는 느림의 미학이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였던 성 바오로가 전도를 위해 무려 2만㎞의 순례길을 걸은 일이나, 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된 기본적인 종교의무 중 하나인 메카의 성지를 순례하는 '하즈' 또한 걷는 것에서 출발한다. '일표일납 여박무루(一瓢一衲 旅泊無累)'라 표주박 한 개, 누더기 한 벌이면 어딜 가나 거침이 없다는 행자의 수행도 걸으면서 깨달음에 다가간다.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 지역과 지역을 잇고, 내 것과 네 것의 만남으로 새로운 소통의 문화를 낳는다. 그래서 둘레길 또한 길의 재발견이다.

거제는 산과 바다와 들과 하늘을 모두 갖춘 땅이다. 거제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드물다. 우리나라 최남동쪽에 위치한 거제도는 동서가 22㎞로요, 남북은 39㎞로 제주도 면적의 1/4.5 정도에 불과하지만 해안선은 제주도 보다 길다.

'섬은 섬을 돌아 연연 칠백 리…' 거제의 노래 첫 소절로 인해 거제의 섬 둘레를 700리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386.6㎞로 약 970리 길이다.

섬의 해안선은 파도와 자연적인 영향에 의해 침식이 일어나면서 굴곡이 심하고 복잡한 지형으로 형성된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으로 곶(串)과 만(灣)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바닷길에는 모래도 있고, 갯벌도 있고, 몽돌도 있고, 절벽도 있고, 산도 있고 마을도 있다. 북쪽 장목 구영에서 남쪽 홍포까지 어디 하나 절경이 아닌 곳이 없다. 대한민국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없는 명품길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다.

지역의 멋진 명품 길을 걸으며 풍광을 즐기면서 건강도 다지다 보면 향토애도 저절로 생기기 마련이며, 더 나아가 관광의 한 테마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길의 콘텐츠를 어떻게 짤 것인가를 면밀히 구상해야 한다.

언젠가는 섬 전체를 하나의 길로 이어지겠지만 그렇게 서두를 일은 아니다. 하나씩 차근차근 특징 있는 길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 동백 숲이 있는 곳에는 '동백꽃길'을, 전설이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이야기가 있는 길'을, 달빛이 좋은 곳은 '밤에 걷는 길'을, 매뉴얼이 다양화해야 한다.

모든 길이 다 반듯하고 깨끗하고 편할 필요가 없다. 언덕길도 있고, 돌길도 있고, 모랫길도 있고, 험한 길도 있고, 미운 길도 있어야 한다.

몇 백명이 동시에 걸어갈 수 있는 길도 필요하지만 혼자 명상하며 걸을 수 있는 길도 있어야 한다. 가파른 언덕을 헉헉거리며 걷기도 하고, 때로는 편안하고 아늑하여 더없는 행복에 젖어 보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게 동요를 흥얼거릴 수 있는 추억의 옛길도 있어야 한다.

명품은 그냥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치밀한 계획과 남다른 특징이 있어야 한다. 남과 같은 길을 만들려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제 시민들의 의식수준이다. 1월 25일 거제신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무려 8억을 들여 조성한 '옥포 해안산책로'가 입구부터 쓰레기로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 아니라, 해안데크와 안전휀스가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니 이런 게 문제다. 아무리 명품길을 만들어도 이런 수준으로는 헛일이다.

끝으로 꼭 지적하고 싶은 말은 가장 좋은 길은 사람이 만들어 논 길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 준 길이다. 가능한 사람의 손이 적게 들어갈수록 명품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떠날 채비를 갖추어보자.
길을 떠나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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