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원 칼럼위원

몇 년 전 가깝게 지내는 어떤 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당신 주변에 있는 oo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니 가까이 하지 말게.”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 충고는 고맙지만, 저 같은 경우는 저하고 접촉하는 면만을 보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그런 충고를 했던 이는 사업에 실패하여 여기 저기 빚을 져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을 보았고,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던 그 사람은 별 탈 없이 요즘도 가끔 전화를 주고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고 나쁨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좋은 사람이다.’ 혹은 ‘나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좋은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나아가 조선 건국의 태조 이성계와 자초 무학대사의 대화를 떠 올려 봐야 한다.

이태조가 대사를 향해 장난스럽게 던진 말 “스님! 당신은 돼지 같소이다.” 이 말에 무학대사는“소생은 폐하가 부처님으로 보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지엄한 건국의 태조앞에서 기분을 거스리지 않으면서 뼈 있는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자 태조가 되묻는다.“짐은 대사를 돼지같다고 하였는데, 어찌 대사께서는 짐이 부처로 보이는가?” 대사는 답하기를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돼지일 뿐이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만물이 부처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은가? 나의 편협함이, 그리고 편견이 세상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가! 멀쩡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 역시 나에게 원인이 있다고 볼 수는 없는가!

노나라 사람인 공자가 제나라에 머물 때의 일이다. 평소 공자를 극진히 모시고 예(禮)에 밝은, 밥을 짓던 제자가 솥뚜껑을 열고 손으로 밥을 찍어 먹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공자는 속으로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평소에는 자기를 극진히 모시면서 예를 갖추었는데, 남이 보지를 않는다고 해서 조상에게 바칠 밥을 손으로 먼저 찍어 먹다니 하면서….

나중에 밥상을 들고 들어온 제자에게 공자는 넌지시 힐책을 한다. “ 꿈 속에서 선조를 뵈었는데 밥은 깨끗한 것으로만 올리라더구나.”

그러자 제자는 “솥뚜껑을 여는 순간 검불이 떨어져 검불이 붙은 밥을 그대로 제사상에 올릴 수가 없고, 또 사람이 먹는 밥을 버릴수도 없어 검불붙은 밥을 저가 먹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큰 실수를 하였다. 이제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도 함부로 믿지를 못하겠다. ”

공자같은 성현(聖賢)도 이런데…. 우리는 대체로 남의 말도 쉽게 믿는다. 하물며 자기의 눈으로 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난무하는 많은 말들 중에서 진실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또한 사람은 쉽게 남을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 남을 일컬어 나쁜 사람이라고 했을 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천사일까?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신의 뜻을 알려고 처절히 기도하는 구도자일 수도 있고, 한없는 연민으로 불행한 이웃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그렇게 살아간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밥을 먹는 입은 달아 주었지만, 밥까지 차려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인간의 본질 중에 여전히 남아있는 동물적 본성 때문에 그러하기도 하다.

세상은 바로 이런 성정(性情)을 지닌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꾸려져 가는 무대이다. 그렇다고 하여 어둠속에 가려진 모든 일들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논어의 ‘일신(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날마다 새로워 져야한다. 그것은 한 개인의 발전적 역사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전체로서는 인류를 최상의 상태로 이끌기 위한 집단의 교리이기도하다.

새해에는 다시 새로워 져야 한다. 나도, 우리도, 우리나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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