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성탄절이 다가오며 곳곳에 성탄트리가 세워지고 캐롤송이 울려퍼진다. 우리는 성탄절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누가복음에서는 성탄과 관련하여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세 사람에게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시므온: 위로를 기다림.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위로란 인간이 고립된 존재임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위로는 인류 전체에 보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메시야에 대한 신앙에서 떠난다면 우리 인간은 외로움·공허감·불안감·좌절감과 씨름하며 살 수 밖에 없다. 위로는 낙심하는 사람에게 찾아와 그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괜찮을 거야. 내가 너와 함께 여기 있잖아.’ 시므온이 경성하여 간절히 기다리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마리아와 요셉이 결례를 행하기 위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온 바로 그 날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발견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위로자로 오셨다.

안나 : 구속을 기다림.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던 또 한 사람은 안나이다. 안나는 남편이 죽은 후 평생을 성전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보냈다. 안나는 시므온과 동일한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기대의 방향은 달랐다. 그녀의 기다림에서는 강조점이 ‘예루살렘의 구속’에 있었다.

구속이란 인류가 포로상태에 있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안나는 평생을 죄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류를 구원해주실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나는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바로 그분이 마침내 여기에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우리의 구원자요 구속자로 이 땅에 오셨다.

아리마대 요셉 :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림.

누가는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던 또 한 사람을 말하고 있다. 시므온이나 안나와 달리 아리마대 요셉에 관한 기록은 예수님께서 태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장면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누가는 그에 대해서도 기다림이라는 동일한 단어로 소개하고 있다. 특별히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란 인간이 올바른 통치를 받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시사해 주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홀로 내버려두면 자기 삶에 대해 적어도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관리를 잘못하게 된다. 예수님은 완전한 통치자로 오신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예수님은 지상에 오셔서 시므온과 안나, 요셉이 구하던 바로 그것을 제공해 주셨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권세가 그것이다. 권력의 지위에 있던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다. 기도와 예배로 생을 보냈던 안나는 하나님의 구속을 기다렸다.

지위도 직함도 없었던 평범한 사람 시므온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다림에 적절하게 응답하셨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위로자로, 예루살렘의 구속자로, 하나님나라의 통치자로 이 땅에 오셨다.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하나님은 이번 성탄절에도 우리에게 적절한 은총으로 다가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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