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두호 칼럼위원

오비이락이었을까. 내가 K사에 보낸 글의 발표가 궁금하여 전화한 날 오후에 뜻밖에도 T시 문인회장이라 하면서 대뜸 인신공격적 서두에다가 내 글의 제목과 ‘T시 문학이 거제에가 거듭나야 할 이유가 뭐냐’며 심지어 말의 조사까지 비꼬면서 격한 공박을 해왔다.

나는 내 글의 서두에서 해명한 제목에의 설명은 물론 ‘거듭난다’는 본의를 과대해석 말라고 했건만 급기야 ‘이 ××’ 욕설에 이르러선 나도 앵무새식 반복으로 수화기를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산문깨나 쓰는 인진 모르지만 이는 정녕 전파를 통한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나서 1주나 뒤 또 T시 어느 단체장이라며 전화가 왔는데 이번엔 매우 정중한 어조여서 나는 동일인인 줄 알고 이번엔 어조가 왜 이리 격변하였냐 하였더니 자기는 예술원장이라며 전의 전화는 모른다 하였다.

그러나 시장실까지 연계시키는 것이 사전 사발통문이 돌았던 것은 짐작이 갔다. 그래도 결과에 있어선 비교적 차분히 대화를 주고받아 나는 글의 배경을 설명하고 나와 T시의, 또는 나와 T시문학과의 역사까지도 대충 늘어놓아 상대가 시를 쓴다기에 글에는 논조라는 흐름도 있지 않느냐고 역시 이쪽에서 미리 미안하다고 개진한 대화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화해의 제스쳐를 받아가며 어떤 단체를 팔아 개인의 사기를 꺾어보기란 그리 어려울 것도 없으리라. 특히 그것이 일방적 전류의 흐름이고 보면 수습에도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보다 자유롭고 공정한 해명의 장으로서 이 글을 제시하는 바다.

일제하 나의 부형은 부분소작농이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붙이던 통영의 Y사 사답 3두락을 사들이고 그 돈을 그때는 아직 미성한 내가 해저터널을 넘어 휴수해 갔었다(일기장에 그 기록이 있었다).

미구에 토지개혁령으로 하여 남들은 다 공짜로 불하받았던 땅을 말이다! 나는 일정하 유지들의 친일적 행각도 들어 알며, 개화의 바람을 탄 사람들이 너도나도 앞다퉈 현해탄을 건너 출향할 때 우리 5현제 중 유독 신지식에 접한 계형이 일본을 마다하고 북향하여 연해주나 갔었던지 지금껏 불귀의 객이 된 것을 서러워하고 있다.

한편 동랑과 연치가 비슷한 맏형에게서는 일본서 동랑과 교린한 소식도 들을 수 있었고 해방 당년에는 함께 통영의 그의 부친 약국에서 하룻밤 묵은 기연도 가졌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끔 청마의 저 호국 땅에서의 ‘깃발’을 타산지석으로 상기하며 생활과 문학과의 연관을 철석같이 믿으려 했다.

아무튼 해방된 조국의 하늘아래 부산M신문사에서 Y사장 소개로 홍안의 청마를 만나게 되어 나는 그것을 내 문학생활 초창기를 점철한 한 기념비적 장면으로 간직하고 있다.

둔덕과 통영! 일의대수를 끼고 나는 어느덧 그곳에 보직을 받으면서 초정을 만나고 그와 당시 문총의 일원으로 ‘×××낭독시집’에 시를 발표하였다. 그 무렵 박경리와도 만나 그때 창간된 ‘현대문학’지에 대한 촌(호)평도 나누곤 하였다.

나는 박경리의 ‘토지’를 거의 읽지 않는다. 내가 게을러서인지 취향에 맞지 않아서인지는 여기서 논할 계제가 아니며, 내가 소설을 쓰기로 했다면 농노의 화두를 극복한 보다 생성적 심리추구의 정채 있는 작품을 구성했을 것이다.

사회도 문화도 하나같이 자본주의란 거대한 괴물 앞에 질주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기름띠 같이라도 그 위를 떠도는 표비적 문학작품 하나가 그립지 않은가.

남의 말꼬리나 잡고 흔드는 패려한 패거리 의식으로는 이 땅의 문학재건은 고사하고 감정적 대립으로 미풍양속마저 해칠 우려가 제기된다.

우리는 그런 때 저 이웃나라 일본의 2대째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모씨의 작품, 그 일본서도 작은 섬나라 ‘시코구(四國)’를 무대로 한 소설의 빼어난 성장소설을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