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길 거제수필문학 회원

아침이면 나는 호젓한 논길을 따라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문안을 갔다. 길을 걸으며 조용필의 노래 〈그 겨울의 찻집〉을 곧잘 흥얼거렸다. 나의 18번이기도 한 이 노래가 노랫말도 좋거니와 나하고 어머니 사이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연관이 있어, 더 애창곡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께서 기거하는 방에는 장롱 하나가 달랑 놓여 있고, 그 옆에 텔레비전 한 대가 전부였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어버이날 달아주었던 카네이션 한 송이와 매달아 놓은 마른 유자가 아버지 영정사진 밑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어머니 손수 차려낸 아침을 먹고 난 뒤 두 사람은 연인처럼 다정히 커피를 마셨고, 그 노래 가사처럼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둘은, 외로움을 나누어 마셨던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외딴집이다. 소를 사육하다 보니 소 마구(축사)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그래서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한 번씩 자식 사는 모습이 궁금하여 간간이 오실 때는 무척 힘들어 하셨다. 근래에는 지팡이 대신으로 유모차를 밀고 오셨다. 유모차에 담아 온 호미를 들고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어휴! 이 풀들을 여가 봐서 좀 매지”하신다. 점심시간쯤에 노인네가 잔디밭에 엎드려서 잡풀 뽑는 것이 보기가 민망해서, 나는 일부러 “엄니 저 지금 읍내에 볼 일이 있어 나가는데 테워다 드릴테니 지금 가입시더”하면, 힘들게 걸어갈 일이 걱정이 되시는지 할 수 없이 따라나서곤 했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 세상 모든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리셨다. 그동안 둘만의 애틋한 정만 남겨놓은 채, 떠나시던 날 이제 병원에서 퇴원하면 아들 집에서 같이 살자는 말을 했다.

다른 때 같으면 어림없다고 했을 텐데, 그날만은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 여러 가지 이유야 있었겠지만 평소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하셨고, 특히 열일곱 나이에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평생을 살아온 집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 당신의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말 하고 온 날 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실 줄이야! 나는 끝내 어머니를 내 집으로 모셔오지도, 마지막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가족들의 슬픔 속에 어느새 어머니 사십구제까지 마친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우리 집 잔디밭은 계절 따라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고, 목련이 겨울 맞을 준비를 하느라고 잎을 떨구었다. 그 잎을 쓸려고 뜰로 나가보니, 잔디밭 여기저기 땅을 뒤진 흔적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두더지란 놈의 소행이다. 사방이 블록담인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요즘은 두더지도 귀할 뿐더러 집 지은 지 십년 넘게 아직 이런 일이 없었다. 두더지는 해 떠오르기 직전에 활동을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어쨌든 잔디밭을 들쑤셔놓는 그놈을 내일은 기다렸다가 꼭 잡아야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단단히 별렀다. 다음 날 나는 생각과는 달리 늦잠을 자고 말았다.

허둥지둥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 보니 잔디밭에는 새로운 흙무더기가 솟아 있었고, 그 흙무더기 위에 무서리가 하얗게 내려 있지 않은가. 아침 햇살이 그것을 비추고 있었다. 순간, 살아생전 어머니가 나에게 담아 주던 고봉밥이 연상되었다. 내가 요즘 누가 고봉밥을 먹느냐고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면, 한창때는 이보다 더 큰 보시기에 머슴밥을 먹지 않았느냐며 기어이 담아 주던 고봉밥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그것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어머니 생각에 잠겼다. 잘 펴지지 않는 허리로 쉰 살이 넘은 아들에게 고봉밥을 담아 주면서, ‘나가 왜 이리 됐노! 나가 왜 이리 됐노!’ 한탄하시던 모습과 어릴 적 보았던 닷 마지기, 그 큰 밭을 혼자서 매던 곧고 당차던 등허리는 어디로 가고, 내 집 잔디밭을 맬 때의 그 초라한 굽은 등하며 오늘 아침 두더지가 밀어올린 고봉밥 같은 흙무더기를 보면서 묘한 느낌이 왔다.

생전에 그랬듯이 혹시 어머니께서 먼 길 떠나서도 내 집 뜰에 오셔서 아직도 못난 이 자식을 걱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차마 나는 두더지를 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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