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제의 성(城)15】경상남도 기념물 제206호 '구율포성'
거제 북쪽 해안방어의 요충지 '구율포진성'

거제는 성곽유적의 보고(寶庫)다. 삼한시대 변진 두로국부터 왜와 국경을 마주한 탓에 수천년 동안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거제지역 성곽 유적의 역사 속엔 외적을 막아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다. 특히 거제지역의 성은 시대별·형태별·기능별 등 다양한 성이 존재해 성곽의 박물관으로 불린다. 섬 하나에 성곽 유적이 이만큼 다양하게 많은 곳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본지는 거제지역의 성곽 유적을 통해 선조들이 만들어온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 '거제의 성'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왜구들의 주요한 침입 경로는 주로 거제도를 동쪽을 거치기 때문에 조선 초기 설치된 수군진은 구율포진과 같이 거제지역 동북쪽에 설치된 곳이 많았다.
왜구들의 주요한 침입 경로는 주로 거제도를 동쪽을 거치기 때문에 조선 초기 설치된 수군진은 구율포진과 같이 거제지역 동북쪽에 설치된 곳이 많았다.

거제시 연초면 명동마을에서 장목면 소재지로 가는 길에 율천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동쪽바다를 제외한 나머지 삼면(三面)은 높은 산으로 감싸고 있어 바다쪽에서 확인하기 힘든 지형으로, 이곳에 구율포성이 자리잡고 있다.

주민에 따르면 예전에는 마을에 있던 율천내(川)가 바다와 맞닿아 있을 정도로 해안과 가까운 곳이었다고 한다.

율천마을이 수군진과 관련된 최초 기록은 문종 원년에 영등포와 옥포가 서로 멀어 율포에 목책과 선군을 배치했다는 기사다. 영등포진과 옥포진 사이의 방어 요충지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왜구들의 주요한 침입경로는 주로 거제도 동쪽을 거쳐 부산·진해·전라도 방향의 육지에 있는 민가를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 초기 수군진은 영등포진·옥포진·지세포진·조라포진과 같이 거제지역 동북쪽에 설치된 곳이 많았다.

구율포성은 현재 민가와 경작지로 인해 대부분 훼손된 상태지만, 석벽의 잔존 형태 등을 보면 오량성이나 고현성과 축성 방식이 비슷해 조선 전기에 쌓은 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구율포성은 각종 읍지와 지지에는 둘레 900척·높이 13척, 현존 둘레 360m·높이 3m·폭 3.4m 정도라고 기록돼 있지만, 지난 1995년 동아대박물관의 '거제성지 보고서'에는 구율포성의 둘레는 360m·높이 3m·폭 3.4m로 돼있다.

성의 구조는 남북 양쪽에 반원형의 성문이 있었고, 성문 위에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성가퀴)을 설치했으며, 현재 그나마 보존 상태가 양호한 남문의 입구는 'ㄱ'자 모양의 옹성을 설치해 방어에 유리하게 설계됐다.

주민에 따르면 동쪽과 서쪽에도 성문이 있었으며, 현재 남문의 경우 진입로 훼손이 심해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구율포성은 원래 외포 바닷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실제 장목면 외포 앞산인 망월산에는 석축 시설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드론으로 촬영한 구율포성 전경, 구율포성은 현재 민가와 경작지로 인해 대부분 훼손된 상태지만, 성곽의 잔존 형태 등을 보면 오량성이나 고현성과 축성 방식과 비슷해 조선 전기에 쌓은 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드론으로 촬영한 구율포성 전경, 구율포성은 현재 민가와 경작지로 인해 대부분 훼손된 상태지만, 성곽의 잔존 형태 등을 보면 오량성이나 고현성과 축성 방식과 비슷해 조선 전기에 쌓은 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삼포왜란 이후 쌓고, 이영남 장군이 지킨 구율포성

구율포성의 정확한 축조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거제현 관방편'에 따르면 '율포보는 현(고현성)의 동쪽 33리에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900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성안에 샘 하나, 시내가 하나 있고 권관(조선시대 변방에 둔 종9품 무관)을 두어 방어한다'는 기록이 있어 이 시기 이전부터 구율포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율포보를 방어한 권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임진왜란 당시 원균과 이순신 휘하의 장수로 이름을 떨쳤던 이영남(1563~1598) 장군이 있다.

이영남 장군은 1571년에 태어나 1588년 18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이후 소비포권관·율포만호(율포권관)직에 부임한 뒤 전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영남 장군은 정유재란 때 가리포첨절제사로 조방장을 겸임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진도해전에 공을 세웠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이후 1621년(광해군 13) 병조참판에 추증된다.

구율포성은 1592년 7월15일(음력 6월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가 거제도 율포만에서 부산으로 향하려던 일본 함대(대선 5척·소선 2척)를 발견해, 대선 2척과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은 율포해전(栗浦海戰)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율포진은 임진왜란 당시 다른 거제지역의 수군진처럼 왜군에 함락당해 왜군의 근거지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95년 동아대 박물관의 '거제성지 보고서'에 기록된 구율포성 측량도. 당시 구율포성의 남아 있는 성곽은 둘레 360m·높이 3m·폭 3.4m 정도로 거제지역 수군진성중 가장 협소한 편이다.
지난 1995년 동아대 박물관의 '거제성지 보고서'에 기록된 구율포성 측량도. 당시 구율포성의 남아 있는 성곽은 둘레 360m·높이 3m·폭 3.4m 정도로 거제지역 수군진성중 가장 협소한 편이다.

두 개의 율포…임란 후 동부면 율포로 옮기다

율포진은 임란 이후 여러 차례 이진됐다. 현종 5년 우수영 옛터의 남쪽(가배량)으로 옮겼다가, 숙종 13년에 다시 동부면 율포, 경종(景宗) 4년에 다시 수영(水營) 남쪽 5리로 옮기고 이전의 율포를 율포구보(栗浦舊堡)·율포보라 불렀으며 권관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율포진에 소속된 선박과 관원은 문종 즉위년의 기록을 보면 최초에는 군관 1인·선군 50명이 배치된 기록이 있고, 동부면 율포로 옮겼을 때에는 무관 종9품 권관·군관 18인·진무 8인·지인 5명·사령 6명·전선(戰船/우사좌초관(右司左哨官)·기패관 5명·도훈도 1명·좌우포도 2명·사부 18명·화포수 10명·포수 24명·타요정수 3명·능노군 120명)과 병선(兵船/선장 1인·사부 10명·포수 10명·타공 1명·능노군 14명), 사후선1(타공 1명·능노군 4명), 사후선2(타공 1명·능노군 4명)이 배치된 것으로 기록됐다.

선박의 수나 관원의 규모로 보면 동부면 시절의 율포진은 권관진 이었으나 배치된 선박과 병력은 만호진에 크게 손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율포진의 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거제현의 동쪽 33리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둘레는 900척·높이는 13척으로 성안에 샘 하나와 시내 하나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을 뿐, 나머지 내·외부시설은 찾을 수 없다.

동아대학교 보고서에 의하면 적대(敵臺)와 성 모퉁이에 건물을 올린 흔적이 확인되고 웅덩이가 확인됐는데, 주변에 기와편이 수습돼 있다. 이 일대는 건물지로 추정된다.

거제지역의 수군진은 임진왜란 전후 장소를 이동했는데 같은 지명이 중복될 경우 옛 구(舊)자를 붙여 지명을 구분한 사례가 있다. 조라(옥포)와 구조라(일운), 영등(학산)과, 구영등(장목), 율포(동부면)와 구율포 등이 그 지명이다.

조선시대 수군진이나 육군진이 옮겨가면서 예전의 지명을 그대로 가져갔는데, 구조라는 성종21년(1603년) 현재의 옥포 북쪽 조라포로 조라진을 옮기면서 생긴 지명이고, 구영등은 인조 원년(1623년) 장목면 영등진이 둔덕면 학산(영등)으로 옮기면서 생긴 지명이다.

장목면 율천리의 구율포진성과 동부면 율포리에 있던 율포진, 그리고 율포진 뒷산에 쌓은 율포산성도 수군진인 율포진이 옮겨 가면서 생긴 지명중 하나다.

율천마을 인근에는 율천성을 방어하던 군사가 불을 밝혔던 '불성개(화명골)', 율포보 관원들이 먹었다는 '성뒤 샘', 조선 수군이 활을 쏘며 훈련하던 '사장지', 마을 사람들에게 위급함을 알릴 때 꽹과리를 쳤다는 '갱숫등' 등 관련 지명이 남아있다.

거제지역 수군진이 이동한 시기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인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를 하던 경상우수영이 통영의 통제영 중심으로 방어를 한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군진의 이동은 임진왜란 전 육군만을 중요시하던 조선의 군사체계가 임진왜란 이후 수군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옮겨진 사실을 반영하는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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