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성(城)14】 거제시 사등면 '사등성'

거제는 성곽유적의 보고(寶庫)다. 삼한시대 변진 두로국부터 왜와 국경을 마주한 탓에 수천년 동안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거제지역 성곽 유적의 역사 속엔 외적을 막아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다. 특히 거제지역의 성은 시대별·형태별·기능별 등 다양한 성이 존재해 성곽의 박물관으로 불린다. 섬 하나에 성곽 유적이 이만큼 다양하게 많은 곳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본지는 거제지역의 성곽 유적을 통해 선조들이 만들어온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 '거제의 성'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거제시 사등면에 있는 사등성은 고려 원종 12년(1271년) 공도정책으로 거창과 진주지역으로 이주한 거제도민이 1422년 돌아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다.
거제시 사등면에 있는 사등성은 고려 원종 12년(1271년) 공도정책으로 거창과 진주지역으로 이주한 거제도민이 1422년 돌아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다.

고려의 공도 정책과 거제도민의 더부살이

공도정책(空島政策)은 섬 거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외부세력으로부터 섬을 보호할 힘이 없을 때 섬을 비워 변방 주민을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고려말 공도정책과 거제도민의 거창·진주지역 이주는 거제의 역사를 설명하는 각종 문헌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는 고려와 조선을 잇는 거제역사이기도 하지만 섬 주민을 200년 동안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킨 뒤 다시 환도하면서 거제지역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기 때문이다. 

이때 거제의 역사는 섬이 아닌 이주지역이었던 거창에서의 역사였으며, 기록도 많지 않다. 

거제도에 다시 거제현이 설치되고 백성이 거주하게 된 시기는 1422년(세종 4년)으로 거제현은 섬으로 복귀한 이후 여러 차례 치소를 이동한다. 각종 지리서에는 거제현이 거창현의 속현인 가조현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 배경을 '왜구의 침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당시 거제주민의 거창현 이주는 왜구의 침입이기 보다는 당시까지 세력이 남아 있던 삼별초의 남해안 장악 및 거제도 인근의 해적집단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여서다. 각종 역사기록에서 왜구의 침공이 대규모화된 시기가 1350년(충정왕 2년)부터인데다 거제지역의 경우에도 이 시기 이전까지 왜구(倭寇)의 거제 침입 사실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등성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거제도민의 재정착 시기에 쌓은 성이다. 거창과 진주지역에서 돌아온 거제도민은 1422년부터 사등성으로 돌아왔지만 성이 좁고 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월 지역으로 치소를 옮겨 목책을 쌓고 살다가 다시 1426년 사등성으로 관아를 옮기고 성을 쌓기 시작한다.

사등성은 거제의 읍치로 선정된 이후 성 축성 공사만 22년이나 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현 지역으로 치소지를 옮기게 된다.
사등성은 거제의 읍치로 선정된 이후 성 축성 공사만 22년이나 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현 지역으로 치소지를 옮기게 된다.

물 부족한 사월포 읍성, 고정리에 다시 읍성 쌓아 

1419년(세종 1년) 대마도 정벌을 끝낸 조선은 거창군에 있던 거제현을 다시 원래대로 거제도에 옮기는 계획을 세우고, 거창 진주에 있는 거제현민을 8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주시켰다.

1422년 처음 거제도민이 돌아온 땅은 사등성이다. 그러나 당시 사등성은 거제로 돌아온 백성들이 모두 모이기에는 좁고, 물도 부족해 수월평(水月平·수월리)에다 목책을 설치하고 임시 관사를 세워 치소를 옮기고자 했다.

1426년 봄에 다시 사월포(沙月浦·사등리)로 선정돼 1426∼1448년까지 사등성을  쌓았다. 사등성은 거제의 읍치로 선정된 이후 성 축성 공사만 22년이나 걸린 대공사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현지역으로 치소지를 옮기면서 짧은 기간동안 거제읍성 역할을 담당했다. 

사등성이 읍성으로 짧은 시절을 마감한 증거는 역사기록 외에 지난 2019년 백암산(사등면 경남아너스빌 뒷산) 봉수대의 발굴 사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백암산 봉수대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백암산 봉수대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졌으며 일반적인 봉수에 비해 사용 기한이 짧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축성 및 읍성으로 사용 시기가 짧고 인근에 위치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사등성과 연계한 봉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426년 축성을 시작한 사등성은 22년만인 1448년 완성되지만, 거제도민의 이전 불가 상언(1451년 5월)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10월 고정부곡(현재 고현동 일대)에 읍성(고현성)을 쌓고 이주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짚고가야 할 점이 사등성과 고현성의 지명이다. 옛 현성이란 뜻의 고현성(古縣城)의 지명은 오히려 사등성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1664년 거제현의 관아가 거제면 지역으로 옮기면서 별도의 읍성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상으로만 보면 현재 고현성은 '거제읍성'이나 '거제현성'이란 지명을, 사등성은 고현성이나 구읍성이라는 지명이 붙어야 하지만 현재 두 성의 지명은 고현성과 사등성으로 남아 있다. 

지난 2009년 거제시가 조사한 '사등성 정밀 지표조사' 자료에 따르면 사등성의 현재 규모는 최대 높이 약 3.5m, 최대 폭 10m, 성 외벽의 둘레는 924m 정도다.
지난 2009년 거제시가 조사한 '사등성 정밀 지표조사' 자료에 따르면 사등성의 현재 규모는 최대 높이 약 3.5m, 최대 폭 10m, 성 외벽의 둘레는 924m 정도다.

거창·산청 사람들이 동원된 '사등성 축성'

1451년 도제찰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최초 사등성의 규모는 둘레 1916척(580m)이지만 동국여지지·여지도서·대동지지 등에서는 2511척 6촌(761m)이나 2510척(760.5m)으로, 경상도읍지·영남읍지·경상도여지집성 등에는 둘레 1809척(548m)으로 기록하고 있어 문헌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최근 조사한 기록은 지난 2009년 거제시가 조사한 '사등성 정밀 지표조사' 자료로, 사등성의 현재 규모는 최대 높이 약 3.5m·최대 폭 10m·성 외벽 둘레 924m·내벽 둘레 876m·성내 면적 6만4342m로 나타났다. 

현재 사등성에는 우물지 및 건물지 기단석·장방형 석재로 만들어진 수구·명문성돌·주춧돌 등으로 사용된 석재·문지공석·성문에 이용됐을 초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사등면지(2009년)에 따르면 사등성을 쌓을 때 사용된 돌은 대리마을 오른쪽 산 반송대(盤松臺)에서 돌을 채취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돌을 채취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사등성에는 성을 쌓을 당시 경상도 각지에서 성을 쌓기 위한 인력이 동원된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은 사등성 성벽에 새겨진 산음(山陰·산청의 옛 지명)
사등성에는 성을 쌓을 당시 경상도 각지에서 성을 쌓기 위한 인력이 동원된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은 사등성 성벽에 새겨진 산음(山陰·산청의 옛 지명)

사등성은 민가 밀집지역과 초등학교가 위치한 동쪽과 남쪽 성벽은 다소 훼손이 심한 상태지만, 북쪽과 서쪽 성벽의 경우 옹성(반달모양 방어성)과 치성(돌출성벽)의 형태가 뚜렷이 남아 있어 드론으로 촬영한 사진만으로도 성의 형태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사등성에는 성을 쌓을 당시 경상도 각지에서 성을 쌓기 위한 인력이 동원된 흔적이 남아 있다.

북문과 남문 사이 수구발견 지점 인근, 그리고 추정 동문에서 사등교회 치성 인근 성벽에는 아직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동문 치성추정 부분과 수구발견 지점 사이에는 '산음(山陰:산청의 옛 지명)이 새겨져 있다. 

또 추정 동문에서 사등교회 치성 인근 성벽에는 '삼가시면 오십일척문말간 오십척산음(三加始面 五十一尺門末間 五十五尺山陰)'이란 명문이 발견된다. 

이 명문은 사등성 축성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해석하면 동쪽 성벽에 삼기현(三岐縣·합천)사람과 산음현(山陰·산청) 사람들이 구역을 맡아서 성을 쌓았으며 삼가현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문 끝까지 51자를 쌓고, 산청 사람들은 55자를 쌓았다는 기록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