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성(城)9】 거제의 첫 관문이었던 사등면 '오량성'
거제의 첫 관문을 지키던 곳…고려 때부터 설치된 역(驛)
거제는 성곽유적의 보고(寶庫)다. 삼한시대 변진 두로국부터 왜와 국경을 마주한 탓에 수천년 동안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거제지역 성곽 유적의 역사 속엔 외적을 막아 나라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다. 특히 거제지역의 성은 시대별·형태별·기능별 등 다양한 성이 존재해 성곽의 박물관으로 불린다. 섬 하나에 성곽 유적이 이만큼 다양하게 많은 곳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본지는 거제지역의 성곽 유적을 통해 선조들이 만들어온 역사의 현장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 '거제의 성'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역참(驛站)제도는 예부터 역마를 두고 관리나 사신, 그 지역에 머물거나 나라 일을 돕고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遞送)했던 곳이다.
역참은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의 전달 등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해 나가는 기능뿐 아니라, 군사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시대에는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의 확립으로 전국 곳곳에 역(驛)이 설치됐는데, 이중 거제지역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역이 설치됐다.
고려는 수도 개성에서부터 전국으로 22개 역로가 있었는데 개성에서 거제 오량역까지는 산남도(山南道) 역로를 통해 28개의 역참을 지나 마지막에 닿는 곳이었다.
견내량과 가까운 곳에 역원을 둔 것은 당시 고려시대에 바다를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거제에 도착하면 최단거리에서 말이나 수레를 갈아타고 거제의 속현인 아주·송변·명진으로 이동하기에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량역은 원나라 간섭기 이후 삼별초와 왜구와 활동으로 섬을 비우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공도정책으로 폐지됐다가 조선 초기 거제도민의 환도와 함께 1425년(세종7년) 다시 복구됐다.
역은 나라의 중요한 행정을 담당하던 곳으로 관방(關防)의 역할도 함께 했는데 지금의 오량역은 1500년(연산6년) 역에 오량보(烏壤堡)를 설치했다는 기록으로 짐작해 이즈음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오량성의 축조시기를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시대부터 역으로 쓰이던 곳이기도 하지만 당시 관리나 유배자가 거제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에 관방성을 설치했을 가능성도 있어서다.
이런 주장은 주민들이 예전부터 오량마을 '외성(外城)'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는 이야기와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경남의 성지' 기록에서 주민들이 오량성을 '피양성'이라 불렀다는 기록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1994년 동아대학교 박물관팀이 발굴 조사할 당시 오량성 성벽에선 조선시대 유물만 발견됐을 뿐 고려시대 유물은 없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량성의 규모를 보면 읍성으로서 기능보다는 수군 진성에 가깝다. 때문에 오량성은 거제지역으로 출입하는 주민들을 통제하는 기능과 거제로 들어오는 관리를 위한 역의 기능과 적의 침입을 막는 관문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오량역은 조선시대에까지 실용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상소로 여러 차례 없어졌다가 다시 설치되기도 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09호 '오량성'
오량성은 국도14호선을 따라 거제대교에서 고현동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만나는 거제관광안내센터 앞에 위치해 있다.
1991년 12월23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09호로 지정된 오량성은 지형을 따라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대지 위에 평면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축조됐다. 성곽은 둘레 1172m·높이 2.61m·너비 5m로 성곽 위에 오래된 팽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있다.
성안에는 오량마을이 있고 주위는 논과 밭이 성을 두르고 있는데 북쪽과 서쪽 성벽은 비교적 보존이 잘된 편이지만 동쪽과 남쪽 성벽은 훼손 심해 지난 2005년 5월과 2007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3억5000만원의 국·도비를 투입해 성곽 일부를 복원했다.
주민에 따르면 복원한 성벽은 원래의 오양성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지만 축성 방법이 사등성(沙等城)과 고현성(古縣城)과 같아 연산군 시절에 쌓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특히 성의 북쪽과 남쪽에 흐르는 하천인 오량천을 해자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성의 전체 형태는 잘 보존된 편이지만 동서남북에 배치된 문지나 치성의 위치는 자세히 살펴야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오량(烏良)의 원래 이름은 오양(烏壤)
고영화 고전문학연구가는 '오양'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오랑=뱃대끈'에서 유래됐다고 보고 있다. 뱃대끈은 말안장이나 길마를 소나 말 위에 지울 적에 배에 조르는 줄'을 말하는 뜻으로 역참의 제일 마지막 역인 오양역에서 '역말을 교체하고 다시 안장과 길마를 장착하는 곳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또 사등면지 등에 따르면 오양의 원래 마을 이름은 고운 흙, 넓은 들판과 까마귀가 자주 찾는 마을이란 뜻의 오양(까마귀 烏·고운흙 壤)이었다가 107대 통제사를 지낸 조경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오양(烏良)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오량역은 거제지역 유배역사와 함께 하는 곳이다. 1112년 7월 고려시대 왕위 계승권 다툼에서 밀려 왕족들이 거제도로 귀양오면서 거주한 곳이 오량역으로, 거제지역의 유배역사가 시발점이기도 하다.
거제지역에 유배온 인원은 고려·조선 시대를 합쳐 50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중 대표적 인물로 고려시대에는 정과정곡의 정서, 조선시대에는 우암 송시열과 이행·최숙생·정황·김진규·김창집·이유원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오량역에 첫발을 딛고 각 유배지로 이동한 것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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