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년고찰 산사를 찾아서 ②】 영남 제일 명당 대운산 내원암
켜켜이 쌓인 마음의 짐 내려놓고 산사 가는 길

'영남 제일 명당'으로 알려진 내원암은 꽃봉우리 모양을 닮은 대운산의 다섯 봉우리 중 가운데 봉우리 자락에 위치해 있다. /옥정훈 기자
'영남 제일 명당'으로 알려진 내원암은 꽃봉우리 모양을 닮은 대운산의 다섯 봉우리 중 가운데 봉우리 자락에 위치해 있다. /옥정훈 기자

산사를 만나는 길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울산의 절경중 하나로 꼽는 내원암(주지 진응 스님) 가는 길은 아름다움은 기본이요 덤으로 속세의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게 만든다.

울산  대운산(大雲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내원암은 석남사(石南寺)·문수사(文殊寺)·신흥사(新興寺)와 함께 울산 4대 고찰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원래 내원암은 신라 중기 고봉선사(高峰禪師)가 창건하고 원효대사가 마지막으로 수행을 했다고 알려진 대원사(大源寺)의 암자였지만, 현재 내원암은 통도사의 말사로 남아 있고 대원사는 내원암 입구에 흔적만 찾을 수 있다. 

11월 중순, 내원암을 품은 대운산은 가을의 소매 끝을 놓고 막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산사에서 마주하는 차갑고 청량한 공기는 다가오는 겨울을 알리고 있었고 산사로 오르는 마음은 겨울을 맞아 다시 깨어나는 듯 맑아졌다.

내원암의 일주문에 닿기 전 돌탑 군락과 500년 가까이 나이테를 그리며 내원암을 지켜온 팽나무가 속세에서 찾아온 중생을 맞고 있었다. 

내원암에 들어서면 대웅전에서 예불 소리가 풍경 소리와 함께 잔잔히 들려온다. 내원암 주지 진응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사시예불을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옥정훈 기자
내원암에 들어서면 대웅전에서 예불 소리가 풍경 소리와 함께 잔잔히 들려온다. 내원암 주지 진응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사시예불을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옥정훈 기자

# 영남 제일 명당에 앉은 대운산 내원암  

팽나무를 지나 곧바로 만나는 내원암 일주문 누각에는 '대운산 내원암(大雲山 內院庵)'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고, 일주문 옆 비석에는 '영남 제일 명당 대운산 내원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력이 몹시 궁금했다. 

일주문을 지나자 고즈넉한 산사 대웅전에서 예불소리가 풍경소리와 함께 잔잔히 들려온다. 염불소리에 자세히 귀 기울여보니 여느 절에서 들리는 녹음테이프 소리가 아니라 육성으로 직접 예불하는 소리였다. 

내원사 관계자(보통은 보살님이라고 부른다)에 물어보니 주지 스님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올리는 사시예불(巳時禮佛·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올리는 기도) 소리라고 했다. 

주지 스님의 사시예불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작고 아담한 암자 곳곳을 느린 걸음으로 둘러봤다. 우리나라에 유명하고 웅장한 큰 규모의 사찰도 많지만, 내원암은 대규모 사찰에선 느끼지 못했던 소박하고 아늑한 정서를 가득 품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예불을 마친 주지 스님이 대웅전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 합장을 하고 일주문 옆에 새겨놓은 '영남 제일 명당 대운산 내원암'의 뜻을 물었다. 

스님은 신라 중기 고봉선사가 대원사를 창건할 때 꽃 모양을 닮은 대운산의 다섯 봉우리 중 가운데에 봉우리에 위치한 곳에 내원암을 세우고 '영남 제일 명당'이라 칭한 후 1000년 넘게 이어온 내원암의 별호라고 했다.

설명을 들어서인지 내원암이 달리 보였다. 명당에 앉은 사찰답게 차분하고 편안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고 명당의 기운을 받고 사는 스님의 법력도, 매일 빠짐없이 올리는 예불소리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지 스님은 "도심이나 인가가 많은 사찰에선 힘들겠지만, 인적이 드문 산사에서 예불을 올리면 그 소리를 새도 듣고 바람결에 흘려보낼 수 있어 내가 좋아서 하는 거지요" 하며 매일 사시예불을 거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한 끼, 내원암 공양간 절밥  

법복을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주지 스님의 안내를 받아 공양간에 들어섰다. 절밥은 4월 초파일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절에 따라 다니며 먹었던 기억이 있어 그리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사찰에 시주하거나 기도를 위해 찾은 신도도 아닌데 끼니때가 됐다며 길손을 자연스럽게 공양간으로 안내받는 경험은 송구하면서도 감사한 경험이었다. 

공양, 또는 절밥은 사찰에 가야만 맛볼 수 있는 청정 건강식이다. 내원암은 TV에 나오는 발우(나무밥그릇)에 밥을 떠먹지 않고 급식판에 뷔페식으로 각종 나물반찬을 골라 먹는 시스템(?)이었다. 

정성스레 마련한 나물 반찬에 된장국을 곁들여 절밥을 먹다보니 허기진 배를 채운 것보다 마음 깊이 감사함의 포만감이 찾아왔다. 특히 산초향 가득한 콩잎절임과 보통 배추가격보다 몇곱절 비싸다는 황금배추는 처음으로 맛보는 별미기도 했다. 

그런데 공양 후 마신 숭늉이 왠지 낯설지 않다. 걸죽하고 고소한 슝늉이 꼭 거제면 성내참기름집의 '뜨물끼리는 가루'로 끓인 숭늉 맛이다. 공양간 보살에게 물어보니 거제에서 유명한 '뜨물끼리는 가루'로 끓인 숭늉은 아니지만 주지스님이 출가 전 사가(私家)가 거제도라고 했다. 

내원암은 석남사(石南寺)·문수사(文殊寺)·신흥사(新興寺)와 함께 울산 지역 4대 고찰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옥정훈 기자
내원암은 석남사(石南寺)·문수사(文殊寺)·신흥사(新興寺)와 함께 울산 지역 4대 고찰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옥정훈 기자

# 차 한잔과 스님의 해답이 남긴 여운 

공양을 마치고 주지 스님이 내려 주신 차를 얻어 마시며 공양간 보살님이 주지 스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예상은 했지만 '영남 제일 명당'에 자리 잡은 사찰의 주지 스님이 걸어온 길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주지 스님이 내원암에 머물게 되면서 부처님의 자비를 받는 일이 연달아 생겼단다.

스님이 내원암 주지를 맡고 얼마 지나지 않아 1급 승가 시험에서 전체 수석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은 것은 물론 얼마 뒤엔 경주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를 내원암으로 모시는 불사도 이뤘다. 

주지스님은 내원암 주지를 맡기 전까지 오랫동안 통도사에서 사회국장과 교무국장을 역임했고, 내원암에 온 뒤엔 울산불교교육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내원암 주지 진응 스님의 예불 모습. /옥정훈 기자
내원암 주지 진응 스님의 예불 모습. /옥정훈 기자

또 최근에는 종사에 올랐다고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승려는 출가 후 6개월 이상 부처님을 모시면 사미계를 받게 되고, 종단에서 인정하는 교육기관이나 선방에서 수행을 4년 이상 하면 비구계 자격, 10년 지나면 3급, 20년 지나면 2급, 25년이 지나면 1급 승과시험을 치른다. 

종사는 승랍(출가해 구족계를 받은 횟수) 30년 이상 비구 스님에게 부여되는 법계로 불교계 최고 법계인 대종사의 바로 아래 단계로 알려졌다. 

이쯤 되면 주지 스님은 스님이 천직인 것 같지만 원래 소설가를 꿈꿨던 국문학도였단다. 

상문동 삼거마을이 고향인 스님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한국전쟁기 집안에 큰 아픔을 남긴 '거제 보도연맹 사건'을 모티브로 한 대하소설을 집필하겠노라 다짐했지만, 군 복무를 마치고 설악산에서 공부했던 산사 생활에서의 인연을 시작으로 결국 부처님께 귀의하게 됐다고 했다. 

500년 가까이 내원암을 지켜온 팽나무와 내원암 일주문 앞에 있는 돌탑 군락. /옥정훈 기자
500년 가까이 내원암을 지켜온 팽나무와 내원암 일주문 앞에 있는 돌탑 군락. /옥정훈 기자

꽤 오랜 시간 주지 스님이 내려 주는 차를 대접받고 내원암을 떠날 무렵 겨울을 코앞에 두고도 초록빛을 잃지 않은 파초 한그루를 발견했다. 

주지스님은 "파초는 사람들이 흔히 아는 바나나와 같은 식물로 불교에서는 용맹정진을 상징 하는데 이 파초라는 놈은 눈이 오는 겨울이면 언제 푸르렀냐는 듯 뿌리만 남기고 잎이며 줄기가 허물어지는 모양이 꼭 인생무상을 말하는 것 같다"며 "우리나라 전통 사찰에 간혹 파초를 심어 넣은 것은 불가의 가르침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지 스님에게 합장하고 대원암을 떠나는 길이 아쉬울 무렵 주지 스님이 세워놓은 작은 팻말의 글귀가 눈에 들었다. 소욕지족(少欲知足), 소욕은 구하지 않고 취하지도 않는 것, 지족은 얻는 것이 적어도 마음에 한탄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세상에 잘 알려진 해설보다 '괴로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써 놓은 주지 스님의 해답이 산사를 떠나고 며칠 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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