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년고찰 산사를 찾아서 ①】 하동 칠불사

대한불교 조계종 쌍계총림 말사인 칠불사의 또다른 이름은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으로, 신라시대 담공선사·고려시대 정명선사와 조선시대 벽송선사·서산대사·부휴대사·초의선사 등 유명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칠불사 제공
대한불교 조계종 쌍계총림 말사인 칠불사의 또다른 이름은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으로, 신라시대 담공선사·고려시대 정명선사와 조선시대 벽송선사·서산대사·부휴대사·초의선사 등 유명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칠불사 제공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그리고 화려한 속살을 보이던 계절은 어느새 저만치 떠날 채비를 마쳤다. 

'동국제일선원'이라는 칠불사(주지 도응 스님)로 내달리는 길은 조금씩 가을과 이별하는 모습을 엿보는 걸음이 됐다. 

칠불사는 가락국의 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수도해 모두 성불한 곳이라고 해서 칠불사라 불린다고 한다.

거제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도응 주지 스님. /옥정훈 기자
거제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도응 주지 스님. /옥정훈 기자

지리산 묘봉(토끼봉) 자락 해발 800여m에 둥지를 튼 칠불사는 화개장터에서 자동차로 20분, 본사인 쌍계사에서도 한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었다.

걸어 올라가면 코가 땅에 닿을 듯한 가파른 산길을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음에 감사할 무렵 칠불사의 일주문과 마주했다. 

칠불사 일주문을 지나는 길 가장자리엔 숲길을 따라 조성한 '명상의 길'이 눈에 띈다. 잎사귀를 털어낸 늦가을 칠불사 명상의 길은 걸을수록 가볍고 오를수록 그윽해지는 기분이다.

일주일만 빨리 닿았어도 지리산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칠불사의 가을 단풍과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림자가 나타나는 연못'이란 뜻으로 물속에 비치는 자식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성불을 기원하기 위해 수로왕 부부가 만들었다는 영지(影池). /옥정훈 기자
'그림자가 나타나는 연못'이란 뜻으로 물속에 비치는 자식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성불을 기원하기 위해 수로왕 부부가 만들었다는 영지(影池). /옥정훈 기자

# 애틋한 그리움 깃든 '그림자 연못'

일주문을 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편으로 하늘과 숲을 오롯이 담은 작은 연못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연못의 이름은 영지(影池)다. '그림자가 나타나는 연못'이란 뜻인데 이 연못은 칠불사 창건의 설화가 깃들어 있다. 

어느날 김수로왕 부부가 수행하러 칠불사에 수행 중인 일곱 아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 하지만 허황후의 동생 장유화상은 왕자들의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만나지 못하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부부는 절 아래 조그만 연못을 만들고 물속에 비치는 자식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성불을 기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영지에 비친 칠불사의 사계절 경치는 칠불사를 찾는 신도와 방문객 사이에서도 유명한 곳인 만큼 지나는 등산객이며 신자들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등산객은 영지를 배경으로 반영된 자신의 자화상을 사진기에 담았고, 신도들은 두 손을 모으고 둥근 연못을 걷고 있었다. 

모정이 깃든 영지에 꽃이 피고, 신록이 깃들고, 낙엽이 춤추고, 눈이 내리기를 반복해온 천 년이 두 번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수로왕 부부의 애틋함은 오롯이 남아 느껴지는 듯했다. 

동국제일선원 현판이 걸린 칠불사 보설루. /옥정훈 기자
동국제일선원 현판이 걸린 칠불사 보설루. /옥정훈 기자

# 동국제일선원이라 불리는 칠불사 

대한불교조계종 쌍계총림 말사인 칠불사의 또 다른 이름은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불교가 전파된 시기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가락국의 불교는 이미 수로왕과 허황후를 만날 때부터 시작됐으며, 그들의 일곱 왕자가 칠불사에서 성불한 시기도 고구려보다 270년 가까이 앞선 수로왕 62년(서기 103년)으로 알려졌다. 

칠불사가 자리한 지리산도 문수보살의 갖춘 이름인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각각 따온 것으로 알려진 만큼 이곳의 산세나 기운은 보통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칠불사의 영험함과 지리산 문수보살의 보살핌은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획을 그은 고승을 수없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칠불사에서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 고승은 신라시대 담공선사·고려시대 정명선사·조선시대 벽송선사·서산대사·부휴대사·초의선사가 유명하다. 

또 통일신라시대 거문고의 전승자 옥보고(玉寶高)도 칠불사 운상원(雲上院)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익히고 신라 땅에 거문고의 명맥을 뿌리내렸다고 한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로 줄 곳 동국제일선원이라 불렸던 칠불사는 임진란 이후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중수했고, 이후 1800년 화재로 복구됐다가 한국전쟁 때 또다시 전소되는 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칠불사를 통광(通光)스님이 1978년부터 15여 년에 걸쳐 대웅전·문수전·아자방·운상원·설선당·보설루·원음각·요사·영지·일주문 등을 복원 중창하고 선다원·사적비·다신탑비 등을 세워 지금 모습을 지켜오고 있다. 

지난 2013년 입적한 통광스님은 쌍계사 주지와 강주·조계종 역경위원장 등을 맡아 교학발전에 이바지했으며 스님의 유지(遺志)는 도응 주지 스님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선을 위한 수행 공간으로 한 번 아궁이에 불을 때면 100일 동안 온기가 남는다고 알려진 아자방. /옥정훈 기자
참선을 위한 수행 공간으로 한 번 아궁이에 불을 때면 100일 동안 온기가 남는다고 알려진 아자방. /옥정훈 기자

# 부처님 품 같은 아자방 구들온기의 기억 

칠불사의 도응 주지스님이 출가 전 사가(私家)는 거제다. 그런 인연을 스님께 밝히고 템플스테이관 아래 영지 우측에 새로 지은 아자방 체험관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자방은 원래 참선을 위한 수행공간이다. 선방 모양이 '아(亞)'자 형태를 띠고 있는데 신라 효공왕(897∼911)때 담공선사가 선방인 벽안당에 아자(亞字) 모양으로 구들을 놓았는데 초기에는 한 번 불을 때면 100일 동안 온기가 남았다고 전한다. 

이 아자방은 이중 온돌구조로 방안 네 모퉁이와 앞뒤 가장자리 쪽 높은 곳은 좌선처(坐禪處)·십자형으로 된 낮은 곳은 좌선하다가 다리를 푸는 경행처(輕行處)라고 알려졌다. 

원조 아자방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44호로 현재 복원공사 중이었다. 아자방의 신비로움은 멀리 당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것으로 알려졌으며, 과학적인 구조로 인해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 

아자방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호사를 받으며 도응 주지 스님의 출가 전 유년시절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쌍계총림 말사인 칠불사의 또다른 이름은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으로, 신라시대 담공선사·고려시대 정명선사와 조선시대 벽송선사·서산대사·부휴대사·초의선사 등 유명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옥정훈 기자
대한불교 조계종 쌍계총림 말사인 칠불사의 또다른 이름은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으로, 신라시대 담공선사·고려시대 정명선사와 조선시대 벽송선사·서산대사·부휴대사·초의선사 등 유명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옥정훈 기자

계룡산 의상대와 원효암에서 동무들과 소를 먹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스님은 거제와 멀리 떨어진 산사에서도 고향 이야기를 훤히 꿰고 있을 정도였고 거제의 역사에 대한 식견도 넓어 남다른 고향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칠불암은 백두대간을 잇는 곳이자 영남과 호남을 잇는 곳에 자리한 '천하제일 명당'이라는 자세한 설명과 함께 "남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가르침까지 줬다.

칠불사 문수보살께 두 손 모아 빌던 수많은 방문자와 신도들의 '소망'이 이뤄지게 해달라는 마음을 남겨뒀기 때문이었을까? 주지 스님께 합장한 뒤 산사를 떠나는 걸음이 왠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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