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시와 바람, 둔덕골로 떠나는 가을여행
꽃과 시와 바람, 둔덕골로 떠나는 가을여행
  • 곽인지 기자
  • 승인 2014.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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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 시인 발자취 따라 형형색색 코스모스 만개해 장관 연출
추수 앞두고 황금빛 들녘 손짓…때 묻지 않은 자연에 가슴까지 따뜻

코스모스 바다에 바람이 불면 색색의 파도가 내게로 밀려온다. 여름의 물러남을 가을바람으로 미뤄 알게 되는 10월의 어느 날 행사 준비로 바쁜 둔덕면을 찾았다.

코스모스를 만나러 둔덕을 찾아가는 길부터가 예술이다.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가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누렇게 물든 논은 몬드리안의 작품 속 직사각형들보다 감동적이다.

원색의 강렬함에서 찾을 수 없는 황토빛의 잔잔한 여운과 은근한 조화. 열려진 창문 틈 사이로 넘어오는 산바람은 여태껏 맡아볼 수 없었던 상쾌함으로 머리를 깨운다.

8일부터 치러질 청마들꽃축제를 앞둔 이곳 둔덕 코스모스 밭은 예쁜 얼굴 한 번 보자고 미리 나와 반기는 맘 급한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가을 추수의 분주함도 미뤄둔 채 잔치 준비에 들떠있다.

청마 유치환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이곳 둔덕 방하리는 매년 6월과 10월이 되면 피어나는 코스모스로 가득해 청마꽃들축제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노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행복' 中
 
청마의 시 한 편 읊조리며 가을 코스모스 밭 사이를 거닐다 보니 저마다 준비한 카메라로 사랑하는 이의 행복한 순간을 담기에 바쁜 사람들이 보인다. 꽃밭에서 그 꽃들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가을이 쓸쓸하지만은 않은 이유다.

멕시코가 고향인 코스모스가 언제부터 국화의 자리를 차지하고 가을의 전령사가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국화보다 먼저 피고 길가에 무리지어 펴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어 정겨워 그런 것이 아닌지 나름 짐작해 본다.

절개나 굳은 의지를 상징하는 남성적인 국화에 비해 길가에 하늘하늘 바람따라 이리저리 춤추는 코스모스의 모습은 참 여성스럽기도 해서 국화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가을을 알린다. 꽃잎 또한 활짝 열린 여인의 치맛자락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가?

둔덕의 코스모스는 참 다양하다. 여러 색과 다양한 모양의 이파리들은 바람이 불면 정신없이 흩날리다가도 어느샌가 일제히 4분의 3박자 왈츠 템포로 춤을 추는 여인들로 변신한다.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우주의 세계를 의미하는 코스모스와 이름이 같은 건 우연이 아닐 거란 짜맞춤을 해본다.

형형색색의 꽃들로 눈요기를 했다면 이제 마음이 차분해지는 시의 길을 걸어보자. 꽃밭에서 마을 쪽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나타나는 청마의 생가와 기념관이 눈에 띈다.

산방산이 포근하게 품어주는 조용한 마을을 지켜주는 고목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소리를 뒤로하고 급한 마음에 아담한 초가의 담장을 넘어다 본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돌담 너머에는 작고 소박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금방이라도 '거기 뉘시오?'라며 굵고 낮은 음성이 들려올 것만 같다. 내 존재를 들킬 것 같은 조마조마함으로 집안에 들어선다. 100여년 전 이곳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을 청마를 떠올리며 마당 구석구석을 누빈다.

뒤꼍에는 가을 하늘과도 맞닿을 듯 석류나무가 드높게 열매를 맺었다.
 
"거제도 둔덕골은
 8대로 내려 나의 부조의 살으신 곳
 적은 골안 다가 솟은 산방산 비탈 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 유치환 '거제도 둔덕골' 中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서려있을 것만 같은 청마 유치환의 시혼을 따라 가을 바람 이 가득한 둔덕으로 향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 가을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가벼운 이끌림이 잠든 감수성을 깨우는 여행으로 이어지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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