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자락에 들어선 피난민촌. @거제신문DB
계룡산 자락에 들어선 피난민촌. @거제신문DB

한국전쟁으로 조용한 바닷가 섬 동네였던 거제지역은 1951년 2월부터 포로와 피난민·군인·거제 지역민들로 하루아침에 사람이 들끓는 섬이 됐다.

거제시지에 따르면 당시 조사된 거제인구는 지역민 10만5000여명·포로 17만3000여명·군인 9000여명(1951년 말 국군 제33경비대대·미군 1개 대대 및 187공수부대 등 9500여명)·피난민 15만여명 등 40만명이 넘었고, 조사되지 않은 피난민까지 더하면 50만명에 가까웠다.

한국전쟁 당시 설치된 거제도포로수용소엔 1951년 3월5일부터 유엔의 구호기관인 'CAC 거제도팀'이 신설됐다. 이때 흥남철수작전으로 거제도에 거주하게 된 피난민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유출된 상품을 파는 난전이 무질서하게 만들어졌다.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 책임자였던 돗드 준장은 무질서한 난전을 관리하기 위해 일정한 구역을 정했는데 사람들은 이 거리를 '돗드시장'이라 불렀고 나중엔 '돗대기' 시장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거제지역에는 여러 곳의 돗대기시장이 있었다. 사등면 사곡고개 인근과 연초면 임전다리·문동 삼거리고개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모두 미군 헌병검문소가 있었던 곳이며, 사등면 돗대기시장은 두동 인근 도깨비재에 위치해 '도깨비시장'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반면 거제에 포로수용소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거제토박이 소개민(疏開民) 1116세대는 피난민 아닌 피난생활을 3년이 넘도록 하면서 보급품을 빼돌려 파는 피난민들보다 더 못한 삶을 이어갔다.

# 1951년 2월 각면별 피난민 형태
# 1951년 2월 각면별 피난민 형태

 

★ 한국사 산책 = UN의 한국전쟁 참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곧바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해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또 유엔회원국에게 유엔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도록했으며, 미국 대통령 트루먼(Truman, H.S.)은 미국의 해군·공군에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1950년 7월7일에 안전보장이사회는 한반도에서 유엔의 군사활동을 위해 미국에게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해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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