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거제 수군진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방어의 중심이 거제도 북동쪽(부산 방향)에서 남서쪽(통제영)으로 이동한다는 것과 이후 신설되거나 이진한 수군진에 진성을 쌓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숙종 4년(1678) 통제영성을 쌓는 시기에도 거제지역에선 통영성 축성을 위해 성돌을 이동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수군진성의 축성 사례나 기록은 없고 거제의 성벽을 허물어 통제영성의 석재로 사용했다는 기록만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군제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무기체계와 전략전술의 변화 및 수군의 전술과 훈련체계의 필요성을 깨닫고 수군의 군사훈련인 수조에 힘썼다. 조선 후기 수군은 수군의 교범인 수조정식(水操程式)에 따라 합동훈련을 실시하는 등 수조를 중요시했다.

임진왜란 이전 거제지역 조선 수군진의 운영은 경상 좌수영의 보조 및 외·내해로 접근하는 왜구의 조기 차단·방어·관리·정찰이었다면 임진왜란 이후 거제지역 수군진의 운영은 견내량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통제영의 보조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거제가 현에서 부로 승격하고 부사가 방어사를 겸직하게 되면서 통제영을 보조하고 거제연안 8개의 크고 작은 진(죽림포·지세포·옥포·영등포·조라포·장목포·율포·가배량(소비포))을 통솔하는 위상을 갖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거제 수군진중 가장 먼저 이동되는 것은 통제영이었다. 거제지역 조선 수군의 주진인 오아포 경상우수영도 통제사가 겸직하게 되면서 통제영에 흡수되고 오아포는 가배량 만호진으로 운영된다.

거제 수군진의 변화. 동아대박물관 거제부도 거제수조도. @거제신문DB
거제 수군진의 변화. 동아대박물관 거제부도 거제수조도. @거제신문DB

통제영은 임진왜란 직후까지 거제 남서부 한산도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오아포에서 1603년 현재의 통영지역으로 옮겨진다. 실제 1604년 통제영이 설치된 두룡포는 1617년까지 거제현의 행정구역이었으나 이후 고성현에 이속된다.

영등진은 임진왜란 당시 오랫동안 왜군에 함락당해 지역 일대가 왜군의 중요 주둔지로 사용되며, 임진왜란 이후 인조 원년(1623)에 견내량으로 이진하게 된다. 

하지만 통제영이 가까워 병력이 중첩된다는 이유 등으로 영조 26년(1750) 혁파됐다가 영조 32년(1756) 통제사 이경철(李景喆)의 주장으로 소비포진의 권관(權管)을 영등진으로 옮겨 설치하고 만호로 승격해 재설치했다.

기존 거제 동북쪽에 위치했던 율포진도 현종 5년(1664) 거제 동남부 지역인 가배량에 옮겨졌다가 숙종 14년(1688) 통제사 이세현(李世顯)이 장계를 올려 부의 동남쪽 20리 가라산 아래로 이진한다. 

장목진은 임진왜란 후 거제에 신설된 유일한 수군진으로 효종 7년(1656) 통제사 유혁연(柳赫然)이 장계를 올려 별장이 근무하는 진이 설치된다. 

장목포진이 만호진으로 승격된 것은 숙종 46년(1720) 부터 이정현을 장목포 만호로 삼았다는 기록부터다. 

장목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의 주요 주둔지로서 조선 수군이 부산지역 탈환에 가장 걸림돌이 된 지역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군은 이 지역을 한 번도 점령하지 못했던 곳이다.

거제의 수군진이 통제영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면서 오양성에 있던 역참도 잠시 동부면 산촌으로 옮겨간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 한국사 산책 = 삼도수군통제사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종2품 주관직으로 조선 수군의 실질적 최고 지휘관이다. 임진왜란 중 1593년 8월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물 당시 초대 통제사가 됐다. 삼도통제사·수군통제사라고도 하며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하삼도(下三道)의 수군을 지휘·통솔하는 삼남 지방의 조선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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