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대첩은 원래 견내량 해전으로 불렸다. 1592년 8월13일(음력 7월7일) 조선 수군 연합 함대가 당포에 머무르고 있을 때, 거제 목동 김천손이 "일본 군선 70여 척이 낮 2시쯤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 고성과 거제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고 알렸다. 

다음날 조선 수군은 일본 함대 쪽으로 출발해 왜군의 척후선을 만난 후 이들을 추격해 본대와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견내량 해역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같이 대형 선박이 항해하기 어려운 긴 해협이었다. 

이에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해 연합 함대가 일시에 선회해 학익진을 이뤄 일본 수군에 함포사격을 가했다. 

이순신이 견내량해전을 조선 조정에 보고한 장계인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에 따르면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전선 55척(거북선 3척·판옥선 52척)으로 일본함대 73척 중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하는 결과를 얻었으며 이후 조선 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견내량해전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실제 둔덕면 화도와 한산도 일대에는 견내량 해전 당시 일본 수군과 해전 당시 생긴 지명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통제영으로 사용한 한산도는 1900년까지 거제의 행정구역이었다. 1604년 통제영이 설치된 두룡포도 1617년까지 거제현의 땅이었고 이후 고성현으로 이속된다. 견내량해전은 임진왜란 전체 국면에 막대한 영향을 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해전 금지' 명령을 내리고 해안에 축성하도록 하는 등 일본 측은 전략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제해권이 조선에 넘어가게 되자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육군도 진퇴양난에 빠지는 상황이 됐다. 

훗날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을 통해 견내량 해전은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을 무력화해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고 조선이 일본군에 반격할 기회를 마련했다고 기록했다.

한산대첩이 벌어진 견내량해역.
한산대첩이 벌어진 견내량해역.

 

★ 한국사 산책 = 임진왜란 3대 대첩

조선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견내량해전·행주대첩·1차 진주성전투 등을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는다. 

행주대첩 : 1593년 2월 전라 순찰사 권율이 서울 수복을 위해 북상하다가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쳐부수어 승리한 전투로 이때 동원된 부녀자들이 긴 치마로 돌을 날라 석전(石戰)을 벌였다는 구전이 유명하다.

1차 진주성전투는 1592년 10월 3만의 일본군 연합부대가 공격해 왔으나 진주 목사 김시민이 끝까지 이를 항전한 전투다. 이때 의병장 곽재우의 지원으로 각종 화약 무기로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는 9만이 넘는 일본 연합군의 공격과 조선의 지원 포기로 일본군이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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