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왜의 선봉대는 부산포를 시작으로 조선의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북진을 계속했다. 전쟁 시작 2개월여만에 선조와 세자(광해군)는 한성을 버리고 평양까지 쫓겨 간다. 

당시 판옥선 4척(협선 2척)으로 겨우 거제 바다를 지키고 있던 경상우수사 원균은 율포 권관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 지 20일 뒤인 5월4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판옥선(板屋船) 24척과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거제를 지원하기 위해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를 떠난다. 

여수를 출발해 남해군 미조항과 고성군 소비포(所非浦)를 거쳐 5월 6일 한산도에서 도착한 전라좌수군은 원균의 병력과 합류해 남부면 송미포(현재 남부면 다대포 추정)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5월7일 새벽 가덕도 방면으로 북상하던 원균·이순신(경상우수군·전라좌수군) 연합 함대의 척후선은 이날 낮 12시경 옥포만에 약 30여척의 왜선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양지암에서 신기전을 쏘아 올려 본대에 알린다.

신기전은 화살에 화통을 매달아 자체 추진력으로 로켓처럼 날아가는 화살로 옥포해전에선 공격용이 아닌 신호탄으로 사용해 신기전의 용도가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원균·이순신(경상우수군·전라좌수군) 연합 함대는 옥포만에 정박해 있는 왜선 26척을 격파한 데 이어 영등포를 거쳐 합포와 적진포까지 왜의 수군을 추격해 16척을 추가로 불살랐다. 

옥포해전의 승리는 풍전등화에 선 조선의 운명을 되살리는 계기였고, 불패의 성웅 이순신을 만든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순신이 옥포해전 승리를 알리는 장계엔 해전에서 얻은 전리품의 목록이 나오는데 '왜의 물건을 찾아내 5칸이 되는 창고를 가득 채우고도 남고 잡다한 물품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옥포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에 격파된 왜선은 왜군의 보급부대로 추정된다. 

옥포해전은 조선 수군이 왜의 수군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준 일전이었고, 양측의 수군 전력이 노출된 첫 전투에서 대승은 곧 조선 수군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 전투였다.

반면 왜군은 첫 패배의 충격에 보급로까지 위협받는 등 심리적 부담을 안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고 이후 육지에서의 교전에 적잖은 영향을 받게 된다.

 

한국사 산책 = 임진왜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선조 25년(1592) 4월13일(양력 5월23일)부터 1598년까지 약 7년간 조선과 일본(도요토미 정권)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휘하 무장 세력의 전공에 대한 보상 및 잉여 무력을 사용하기 위해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이 전쟁은 오래전부터 도요토미 정부가 계획했다는 주장도 있다. 

임진왜란은 최근 명나라의 조선 지원까지 묶어 16~17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임진왜란이 당시 동아시아 3국인 한중일의 정권을 교체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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