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수군진은 군선의 정박처·병력의 입역처·해양감시 초소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수군 근거지였으며 건국 초기까지 조선의 수군진은 군선이 머무르는 장소로 지정된 해안지역을 정해 유사시 수군이 집결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전략적 요충지에 진을 둔 이유는 기동성이 떨어지는 전근대 수군이 특성상 적의 침입 가능성이 큰 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적의 침입에 대응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만 해도 해양 방어에 적합한 요충지를 선정해 전국 연해 지역에 수군진을 설치했으나 목책만 설치하고 석성을 쌓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선을 타고 다니면서 왜구를 방어하기에는 매번 많은 군량과 군기를 군선에 적재하고 다니는 번거로움이 있고 왜구의 규모가 수군진 병력보다 많을 때는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거점을 방어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조선은 성종 16년(1485) 각 수군진에 성을 축조하고 수군들이 주둔해 생활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게 된다. 

거제를 비롯한 전국의 조선 수군진에 진성도 이 시기에 한꺼번에 진행됐다. 거제에는 오아포(가배량) 우수영성·옥포진성·지세포진성·구조라진성·영등포진성(구영등) 등 5개의 수군진성이 이 시기 설치됐다. 

경상우수영 지역의 수군진성은 성종 17년(1486)부터 성종 21년(1490)까지 5년 동안 만들어지는데, 1490년 6월 조라포진성, 8월 옥포진성과 오아포(가배량) 우수영성, 9월 지세포진성과 영등포진성이 완성된다.

이때 지세포진은 진성이 완성되면서 기존에 지세포 해안변 마을인 일운면 대청마을에서 현재 진성 축성된 선창 마을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거제의 수군진 중에서 가장 늦게 축조한 진성은 구 율포진성으로 정확한 축조시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거제현 관방편'에 기록된 것으로 미뤄 삼포왜란(1510) 이후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연산 6년(1500)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오량성은 수군진성이 아닌 관방성(關防城)의 성격이 크다. 

거제수군진성
거제수군진성

 

★ 한국사 산책 = 진관체제와 제승방략

조선은 건국 후 여진족과 왜구의 침탈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육군과 수군 제도를 신설해 북방 변경과 남방 연안에 군사를 배치했다. 이는 북방의 군익제(軍翼制)와 남방의 영진제(營鎭制)로 발전했고, 세조 3년 진관체제(鎭管體制)로 단일화된다.

진관제도는 진관체제는 각 지방에 주둔군을 두고, 해당 주둔군은 해당 진이나 관을 방어하는 전술 체제다. 이는 적의 대규모 침공 시 진이나 관의 주둔군이 적을 막는 사이에 중앙군이 지원하는 방식이다.

제승방략(制勝方略)은 평시에는 지휘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다가, 적의 대규모 침공이 있으면 각 지방에 있는 군대가 미리 정한 지점으로 모인 다음,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가 지휘관이 되어 전장으로 나가는 방어 체제다.

주로 조선 초기 여진족을 제압하기 위해 함경도와 같은 북방에서 시행됐고 남방에서는 임진왜란 발발 후 일시적으로 시행했다. 하지만 제승방략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허점이 드러났고 조선은 다시 진관체제로 복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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