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3년(1403)에 웅천의 내이포(乃而浦=薺浦)에 처음 설치된 경상우도수영(慶尙右道水營)은 세종 7년(1425) 폐지 후 거제의 남쪽인 탑포(塔浦)와 오아포에 차례로 옮겨왔다. 1430년 3월 산달포(山達浦) 절도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이 시기 경상우수영은 한곳에 정착했다기보다 군선의 정박에 따라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가 만들어질 당시(1454) 경상우수영이 관리하는 수군진 8곳 중 거제지역의 수군진은 경상우수영인 오아포와 영등포 2곳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조 5년 경국대전을 만들 시기 거제의 수군진은 오아포 우수영 주진(主鎭)으로 삼고, 영등포(구영)·지세포·조라포·옥포에 제진(諸鎭)을 두면서 거제지역에만 5개의 수군진이 운영됐다. 이는 당시 경상우수영 11개의 수군진 중 절반에 가까운 규모로 거제 수군진이 남해안 방어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초기 수군진 대부분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방어하기 위한 목적과 왜와 대외관계에 따라 설치됐다. 이때 설치된 거제의 수군진에 모두 수군 진성(水軍 鎭城)이 만들어진 것도 조선 수군의 방어전략과 관계가 있다. 거제의 수군진은 왜구와 일본의 침략에 따라 변화양상을 보이는데 조선 초기 거제지역 수군진의 설치 배경은 경상도로 침입하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였다. 

거제의 수군진은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증설되는 것은 물론 폐진(廢鎭)·이진(移鎭)·재설진(再設鎭) 등 큰 변화를 겪는다. 임진왜란 시기 이전까지 거제 수군진 일본의 지방세력 또는 소규모 왜구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임진왜란 이후에는 국가 간 정규군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집중하고 조선 수군의 구심점인 통제영을 보조하는 역할에 비중이 더 커지게 된다.

 

★ 한국사 산책 = 경국대전

조선은 고려 말부터 100년가량 기존에 있던 조선경국전·경제육전·속육전 등 시행 법령을 다듬고 고쳐 1470년 경국대전을 반포했다.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은 중국 법과 구별되는 이·호·예·병·형·공전의 6개 법전으로 구성해 조선만의 법체계를 마련했으며 국가 운영을 위한 기본 법전으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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