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더위와 바람으로, 빗줄기로 요란하던 여름이 하늘 구름 뒤편에 흐릿하게 가물거린다.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하늘과 구름이 깨끗하다. 가로수 우듬지나 전봇대, 낡은 고철덩어리에 한낮동안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여름이 주는 공백은 긴장을 풀어준다. 그동안 세상은 얼마나 나와 가까이 있었는지, 세상 사람들의 소리에 둔감했는지, 이름 지을 수 없는 아픈 사연들에 눈감았는지, 옳고 그름의 경계선에서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 쳤는지 가을이 오면 알려줄 것만 같다. 그래서 가끔 가을은 강력한 종교로 다가온다. 포교하지 않는 강력한 종교, 산이 누운 자리마다 와불이고, 성당의 기도로 들린다. 나보다 앞서 가을에 자리한 나무들이 지친 다리를 만져줄 것 같다. 성난 여름을 이겨내고 가을을 느끼는 자, 가을이 되고자 하는 자, 이미 가을이 되는 사람들이 당위와 의미 따위는 걷어치우고 오롯이 한 계절을 받아들일 숲에서 맨 몸으로 만난다면 지구의 온도가 가라않겠다 싶다.

숲에 들면 같이 있는 사람의 맥박과 호흡이 비슷해진다. 일상은 흐트러지는 듯 긴장에서 벗어나고 심장이 펄떡이는 소리 하나로 함께 살아 있음을 기뻐하게 된다. 숲 아래 때 맞은 들꽃이며, 아직 싱싱한 9월의 잎이며, 거미에 유혹당하지 않는 바람까지 내 몸에 들이고 펄펄 끓는 여름동안의 사건사고를 잊고 시냇물의 기도 외는 소리를 들어 보자. 가을의 숲에 들어 지친 사람들이 음악처럼 연인처럼 또 다른 계절로 나아갔으면 한다. 너무 빨리 걷지는 말고. 그러다보면 어느 방아깨비의 한 쪽 다리를 어깨에 메고 다비식을 준비하는 개미들의 행렬에 나도 쪼그리고 앉아 기도문을 외는 것이다. 아무에게나 상처를 마구 던져버리는 미친 세상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사랑의 분명한 명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게 해 달라고.

허튼 지식이 박힌 논쟁이 아닌, 서툴고 투박한 일상의 마음이 쉽게 허용되고 이해되는 아주 사소한 풍경의 사랑이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장엄한 세계의 이념보다 단순하게 먹고 사는 일이 전부이면서 사랑이 더 소중하게 대접받는 세상이 되려면 아직 얼마의 기도가 돌고 돌아야 할까?

토종 개구리가 나뭇잎 사이에 자리를 잡고 나를 응시한다. 내가 저를 못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개구리 최후의 존재를 존중하는 것이고, 궁금하건 장난이던 건드린다면 묻지 마폭행이 되고 질서가 깨어지고 숲의 평화가 무너진다. 일부러 돌아서 숲을 건넌다. 우리 둘 사이에 잠시 팽팽했던 긴장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다시 물소리가 들리고 숲의 미백에 가을이 들어찬다. 사람 사이도 이런 긴장은 늘 유지되고 있는데 대처할 사이도 없이 훅 공격이 들어온다면 난감하다. 이른바 묻지 마폭행, ‘묻지 마살인이 이런 것이다. 한국 사람은 자존심이 강하고 주체성이 강하여 어떤 공간에서도 존재감을 잃었다고 생각하거나 자존감이 무너지면 공격할 대상을 찾게 된다. 공격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야 만다. 결국은 후회가 따르는 미친 짓이다. 마구잡이로 불특정 사람을 공격하는 그 사람의 잘못으로만 시시비비를 매길 수는 없다. 한 나라의 정체성, 사회 시스템의 문제다. 이런 시스템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이 해결책이다. 시스템에 너무 몰두하면 결국 시스템은 사람을 죽이고 만다. 그 대상에는 우리 모두 포함된다. 그러니 저 나쁜 놈, 죽일 놈! 소리는 하되 숲에서 세상을 다시 그려보시라. 작거나 크거나 깊거나 얕거나 모두의 삶도 어떤 역경에 처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세상사람 아무에게나 해코지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가을은 나의 종교다.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닌 아주 사소한 숲의 발걸음과 같이 녹슬지 않는 사랑이 풍만한 따듯한 종교다. 요즘 세상에는 사랑이 부족하다고 이해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사랑이 언제 주변에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가을의 숲에서 사랑을 집어 가슴에 채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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