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해약조와지세수군진. @최대윤
계해약조와지세수군진. @최대윤

세종 1년(1419) 대마도정벌 이후 조선이 당시 왜구의 본거지였던 대마도와의 교역을 중단하자 생활의 위협을 받게 된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사신을 보내 다시 통교할 것을 계속 요청한다.

그 결과 세종 8년(1426) 조선은 내이포·부산포·염포 등 삼포(三浦)를 열어 교역을 허가한다. 삼포의 개항 이후 왜인이 늘어나자 조선은 세종 25년(1443) 대마도와 조선 간 세견선(歲遣船)에 관한 조약인 계해약조을 맺어 대마도의 무역선은 50척으로, 조선에서 주는 곡물은 200석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계해약조 이후 대마도 등 왜인들의 교역 요구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의 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등 왜인의 관리는 점점 어려워졌다.

성종 8년(1477)에는 삼포에서 왜인에게 쓴 비용(倭料)이 2만2390여석이며, 성종 21년(1490)부터 성종 23년(1493)까지 3년간 삼포에서 왜인에게 쓴 비용이 4만500여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포개항 이후 왜구는 줄어들었으나 조선의 재정부담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특히 성종 25년(1494) 제포(薺浦)에서는 귀화한지 오래된 왜인들이 어량(魚梁)을 강탈·점거하고 조선 관리까지 구타하는 일까지 일어나는 등 왜인들은 교역 조건을 위반하거나 난동을 부리는 일이 잦았고 큰 왜변은 없었지만 소규모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다.

이 시기 거제에 설치된 수군진은 지세포과 옥포진·조라진 등이다. 세 곳의 수군진 모두가 거제의 동쪽, 대한해협과 대마도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세포진은 계해약조를 맺고 시행하기 2년 전인 세종 23년(1441) 설치돼 계해약조 이후에는 지세포진 주변 일대 바다를 방어하는 일과 더불어 고초도(거문도로 추정)에서 어업을 하는 왜인들의 문인(文引) 검사·징세(徵稅)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 한국사 산책 = 삼포개항

삼포개항(三浦開港)은 세종 8년(1426)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종정성)의 청에 따라 기존에 개방했던 웅천(진해)의 내이포(乃而浦)와 부산포 이외에도 울산의 염포(鹽浦)를 추가로 개항하고 일본인에게 교역을 허락한 일이다.
1418년 제3차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주 사다모리는 단절된 조선과의 정상적 교역을 누차 청해 왔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그들에 대한 유화책의 하나로 3포를 개항한 것이다. 삼포는 웅천(熊川·현재의 진해)의 내이포(乃而浦) 또는 제포(薺浦)·동래(현재의 부산)의 부산포(富山浦)·울산의 염포(鹽浦) 등이다. 3포에는 각각 왜관을 두고 왜인 60명의 거주를 허락했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