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1년 거제현 관청과 관리관노 등 일부 백성들이 육지인 진주·거창 등지로 피난 가서 살다가 1422년 환도(還島)한 역사가 있다. 

거제는 변방에 위치해 도적과 왜구의 약탈이 빈번했다. 

"명진현(溟珍縣)·송변현(松邊縣)·아주현(鵝洲縣)의 해적 좌성(佐成) 등 820명이 투항해 왔다"는 인종 6년 10월 고려사 기록은 일찍부터 거제가 해적의 근거지였음을 보여준다. 

해적들이 거제를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 중심부에 위치하고 일본 등과 가까워 해상활동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남해안 동부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일본과 연결할 수 있는 교두보 확보를 위해 거제를 점령했다. 때문에 고려 정부는 거제현을 거창과 진주 등으로 옮기는 공도정책을 선택하게 됐다.

1271년부터 거제현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 거제사람 모두가 거제를 떠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는 1272년 삼별초(三別抄)가 거제현(巨濟縣)에 침입해 전함(戰艦) 3척을 불사르고 현령(縣令)을 붙잡아갔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삼별초의 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거제현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이후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서였다. 

 

★ 한국사 산책 = 고려의 군역 제도와 군사조직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최우(崔瑀)가 수도 개경(開京)의 치안을 위해 조직한 군대인 야별초(夜別抄)에서 시작됐다. 
야별초는 이후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뉘고,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인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을 더해 삼별초라고 부르게 된다.
삼별초는 최우·최항·최의·김준·임연으로 이어지는 무신정권 집정자들의 무력 기반으로 강화 천도 시절에는 강화도의 치안을 유지하고, 무신정권을 보호했다. 1270년 무신정권 몰락 후 삼별초는 강화도-진도-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항전을 이어갔지만 1273년 여몽연합군에게 진압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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