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 14년(995)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에는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역은 모두 525곳으로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중앙 개성으로부터 전국으로 뻗어나간 22개 역로 중에, 산남도(山南道)길 즉,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합천∼진주 평거역(平居驛)~사주(사천)의 관율역(灌栗驛)~고성의 배둔역(背屯驛)까지의 길로 28개의 역참 마지막 역이 거제의 오양역(烏壤驛)이었다.

오양역은 원나라 간섭기 이후 삼별초와 왜구의 활동으로 섬을 비우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공도정책으로 폐지됐다가 조선 초기 거제도민의 환도와 함께 세종 7년(1425) 다시 복구됐다.

오양에 역원을 둔 것은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 말이나 수레를 이용해 거제의 속현이자 주요 거점인 '아주', '송변', '명진'으로 수송이 편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역(驛)은 나라의 중요한 행정을 담당하던 곳으로 관방(關防)의 역할도 함께 했는데 현재 오양역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오양(량)성은 연산 6년(1500) 역에 오양보(烏壤堡)를 설치했다는 기록으로 짐작해 이즈음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오양성의 축조 시기를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시대부터 역으로 쓰이던 곳이기도 하지만 당시 관리나 유배자가 거제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에 관방성을 설치했을 가능성도 있어서다.

거제 유배의 역사는 고려 때부터로 이는 거제가 개성이나 한양 등 당시 행정중심지에서 가장 멀리 있는 역(驛)인 오양역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거제 최초 유배인은 1112년 유배온 고려 문종의 아들 승통 탱이다. 이후 1126년 이자겸의 난으로 그의 아들 이지언이 가솔들과 함께 거제로 유배왔다.

의종 11년(1157) 거제에 유배 온 정서(鄭敍) 정사문(鄭嗣文)도 거제지역의 대표 유배인이며, 이후 조선 건국과 함께 거제도와 강화도 등으로 쫓겨난 고려의 수많은 왕족(왕 씨)들이 거제로 유배 왔다가 태조 3년(1394) 손흥종(孫興宗) 등에 의해 거제 바다에 던져졌다.

사등면에 있는 오량성과 둔덕기성 아래에 있는 정과정곡 비석. @최대윤
사등면에 있는 오량성과 둔덕기성 아래에 있는 정과정곡 비석. @최대윤

 

★ 한국사 산책 = 문벌귀족

고려의 지배층은 지방호족-문벌귀족-무신정권-권문세족-신진사대부 순으로 세력을 이어간다. 고려 문벌귀족들은 왕권을 견제하면서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왕실과의 혼인으로 세력을 키우고 과거제도와 음서제도를 통해 가문의 지위를 높였다. 1126년 일어난 이자겸의난은 고려 사회의 문벌귀족의 병폐와 붕괴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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