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은숙 전 경남도의원
옥은숙 전 경남도의원

내가 다녔던 1970년대 강원도 묵호읍 소재지의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실은 콩나물시루처럼 아이들로 꽉 찼다. 절반은 남자아이, 나머지 절반은 여자아이였는데 노는 꼴이 달라서 서로 섞이는 일은 없었다.

현재의 교실과 같은 면적의 교실에 2배가 넘는 아이들이 들끓었으니 소소한 다툼이나 갈등이 잦았다.

60명의 반 아이중에 성이 탁 씨인 친구가 있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 몇 살이나 많은지 아무도 몰랐다. 행정 체계가 미비하던 당시에는 예사로 늦게 입학하기도 하고 호적이 늦어서 5살에 입학한 아이도 있었다.

그는 반에서 키가 제일 컸지만, 삐쩍 마르고 조금 어리바리해서 아이들 사이에서는 허풍시로 통했다. 쌀로 만든 뻥튀기처럼 허우대에 비해 실속이 없다는 뜻이다.

어울리는 친구도 없고 행색이 남루해서 아무도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다. 그러나 늘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학교생활이지만 묵묵히, 때로는 속이 없는 아이처럼 히죽거리며 잘 지냈다.

당시의 담임선생님이 교실 벽에 붙인 급훈 액자에는 '가정도 화목, 교실도 화목'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다른 건 넘겨도 친구 간에 싸우는 짓은 못 봐준다는 경고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가을의 어느 날 사달이 났다.

발단은 기억나지 않지만 탁 군과 반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아이 간에 싸움이 생겼다. 탁 군의 평소 성품과 생활태도를 잘 아는 우리는 깜짝 놀랐다. 아마 그동안 쌓였던 불만과 한, 서러움이 주체할 수 없는 계기에 의해 한꺼번에 터져버린 탓일 것이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아시기 전에 빨리 사태를 잠재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남자 아이들은 탁 군의 팔과 몸을 잡은 채, "고마해. 샘이 알면 우리 다 단체 기합받는다"라고 만류했고 그사이 싸움 1등 친구는 잡힌 채 저항도 못하는 탁 군을 몇대 더 때렸다.

탁 군은 억울하고 분해서 소리쳤다. "와 나만 그래…. 저놈이 먼저 때렸고 또 힘이 센 놈을 잡아서 말려야지 와 나만 잡고…." 지금은 그 탁 군이 생존해 있는지조차 들은 바가 없지만, 소수의 하청노조가 처한 사정이 꼭 탁 군의 신세 같아서 그 일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조선 노동자 2만명중 약 절반이 하청노동자이고 약 1만1000명중 하청노조 조합원은 600명,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약 130명이니 직영노동자를 포함한 거제시민에 비해서는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소수 약자 집단이다.

너도나도 나서서 정부와 산업은행,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하청노조에게는 대화로써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약자인 너희들이 파업을 풀라는 말이다.

그 말인즉슨, 협상하되 지난 수 년 동안 못 푼 것처럼 난제가 쉽게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같이 굶을 수는 없지 않냐는 뜻일 것이다. 그때의 그 날처럼 보고만 있으려니 마음이 더 아프다. '우리가 못 버티면 다음은 당신 차례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후 다행히 협상이 타결돼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후유증은 오래갈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시각에도 하청노조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수수색과 원청의 손해배상 소송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거라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조선업계에 만연한 과도한 다단계식 하도급과 대우조선해양의 적자구조 등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 평 감옥 투쟁은 계속될 것인데, 학급의 평화와 체벌을 피하려고 심약하고 외톨이인 탁 군을 붙잡던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은 소수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서 정의와 공정이 더 충만한 선진사회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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