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는 찬란했다. 그들의 건축은 화려했고 예술은 기품이 있고 귀족의 삶은 우아하고 멋스러웠다. 중세에 와서는 상공업의 발달로 생활의 여유까지 생겨 로맨틱한 낭만의 세계를 꽃 피웠다. 그런데 희한하게 17세기까지 화장실이 없었다.

집에서 사용한 요강의 오물을 밤이 되면 창밖으로 쏟아버렸다. 거리는 똥물과 악취로 가득했다. 똥을 밟지 않기 위해 굽이 높은 하이힐이 생겼고, 떨어지는 똥물을 피하기 위해 파라솔이 등장했다. 악취는 역설적으로 향수산업을 발전시켰다. 서양의 고상한 문화의 뒷면에는 똥물이 얼룩져 있다.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농촌에서는 똥오줌이 귀중한 거름이었기 때문에 집집마다 뒷간이 있었다. 친구집에 놀다가도 똥이 마려우면 집에 가서 눴다. 아니면 남의 집에 거름 보태준다고 어른들이 야단을 쳤다. 길에 있는 소똥도 줍기 바빴다. 그러니 거리는 깨끗했다. 그러나 한양은 사정이 달랐다. 한양의 길거리는 똥 천지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오늘날 도성 안은 더럽고 지저분하다. 수레가 없어서 오물을 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뜰이나 거리에 오줌을 버려서 우물물이 전부 짜다. 냇물에 요강의 오물을 버리다보니 축대나 돌멩이에는 똥이 말라붙어 누렇게 변했다'고 했다.

1881년 서른 살의 나이로 일본 시찰을 다녀온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은 '치도약론(治道略論)'에서 말하기를 '근대국가의 제1조건은 위생이 먼저다. 나라를 개혁하기 앞서 똥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치도국(治道局)을 창설하고 도성 안의 모든 무단 똥 배출자를 색출하여 처벌했다. 심지어 말이 싸는 똥이나, 수레의 소가 싸는 똥도 안 치우면 주인이 잡혀가는 판국이었다. 이는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폐지되었지만 똥의 개혁이 문명개화의 시발점이라고 본 개화론자들의 주장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화장실 문화를 가지게 된 지난날 '똥의 역사'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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