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지세포제일교회 목사
천창수 지세포제일교회 목사

세상은 눈물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는 평생에 세 번만 울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눈물이 메말라 버린 이 세상을 아파해야 한다. 세상에는 속일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곧 피와 땀과 눈물이라 했다.

사도 바울은 눈물로서 주를 섬겼다고 한다(행20:19). 우리도 주님을 섬김에 눈물이 있어야 한다. 과거 일제 강점하에서 고달픈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 조상들은 교회당에 모일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소리 내어 기도할 때면 그것은 통성기도가 아닌 통곡 그 자체였다.

6.25전쟁으로 하루하루 비참한 삶을 연명해나가던 시대에 교회란 우는 장소였다.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바로 울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배 시간이 울음바다가 되는 일은 다반사였다고 한다. 설교를 듣고 은혜받아 우는 것보다도 인생의 무거운 짐이 너무나 괴로워서 울었다. 그 슬픔과 한을 풀어놓을 데가 없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고 찬송하면서 울고 기도하면서 울고 서로 붙들고 울고 그러면서 위로를 받았다. 그러면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했다. 그 힘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던 것이다.

눈물에는 여러 종류의 눈물이 있다. 먼저 참회의 눈물이 있다.

다윗은 우리야의 처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우리야를 적진 한가운데 보내어 죽게 했다. 선지자 나단이 이 사실을 책망할 때 다윗은 눈물로서 회개하였다. 참회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슬퍼해야 한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눈물로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감격의 눈물이 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자만이 이 감격을 맛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자는 감격의 눈물이 있다. 구원의 감격,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감격,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감격, 성도에게는 감격의 눈물이 메마르면 안 된다.

세 번째는 애원의 눈물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답답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눈물로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눈물로서 부르짖는 우리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움직인다. 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심히 통곡하며 하나님께 구했다. 이때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왕하20: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가정에 어려움이 있는가?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는가? 하는 일이 잘 안되고 꼬이기만 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울어보라. 특히 교회의 아픔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울어보라. 교인 중에 고난 당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 문제를 교회로 가지고 와서 함께 하나님 앞에 울어보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은 눈물로서 애원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네 번째로 사명을 다하는 눈물이 있다. 바울은 그의 사명을 위해서 눈물 흘렸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사명의 눈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울 사도는 눈물로서 주님을 섬겼다. 주님을 섬기는 사명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우리도 맡은 사명을 위해서 눈물로서 주를 섬기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맡겨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 눈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있기를 바란다.

다윗은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고백했다. 우리의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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