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수 칼럼위원
김계수 칼럼위원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잠시 더운 듯하더니 이내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 펼쳐지고 있다. 답답한 일상을 이겨보려는 듯 지인으로부터 아름다운 풍경들이 안부 대신 휴대전화로 전달된다. 그 사람이 있는 곳의 풍경들이 내게 전해져 올 때 이미 그 풍경들은 정지된 채 죽은 것이다. 마치 꼭지를 따야만 가질 수 있는 과일처럼 말이다.

오래 지난 사진첩을 보게 되었다. 유년 시절의 아이들이 돌담에 나란히 기대어 찍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 당시의 풍경들을 소환한다. 까슬까슬한 돌담의 느낌, 어느 틈엔가 생고구마를 숨기기도 했었고, 구멍 숭숭한 틈에 얼굴을 갖다 대고 비밀스럽게 빠져나오는 바람을 맞기도 했다. 윗동네에서 시집온 새색시의 얼굴이 궁금하여 돌담을 통해 엿보기도 했다.

흙과 마주한 돌담 아래의 시원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집과 집을 경계하는 울타리가 되었고, 길과 길을 이어주는 긴 터널이 되기도 한 돌담은 듬직했고 높은 성처럼 커 보였다. 가끔 무너지는 일도 있었지만 이내 차곡차곡 쌓이어 있었다, 굽은 길을 따라 이어져 유연한 곡선은 무겁고 차가운 돌의 성질과는 달리 아름답기까지 했다. 따뜻했다. 집에 혼자 남아 있을 때 돌담 아래에서 놀았던 기억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제 일 년에 한 번을 제외하곤 거의 찾지 않는 고향이지만 갈 때마다 돌담의 흔적을 찾아보곤 한다. 울퉁불퉁한 흙바닥에는 콘크리트로 마감된 것 빼고는 아직도 옛 그대로 돌담이 자리하고 있다. 단지, 늙은 아비처럼 쪼그려 있을 뿐이다. 무너진 곳이 있기는 했지만 보수되지 않고 그대로 처박혀 있다. 듬직하고 항상 내 키보다 높았던 돌담은 왜 자라지 못하고 그대로일까? 쪼그라진 돌담을 어루만지며 측은해지기도 한다. 형색이 초라해진 돌담 위에 손을 얹고 앞산을 보는데 앞산도 내려앉았다. 웅장한 물소리를 내며 비를 퍼붓던 ‘백년골’의 위용이 사라졌다. 산보다 더 높게 치솟은 송전탑이 옛 위용을 차지했고, 골짜기마다 들어선 화려한 전원주택들이 옛 산길을 허물고 있을 뿐이다. 이젠 돌담과 놀아주고 이야기하는 아이가 없으니 이제 늙어 저리 낮아지고 초라한 것인가.

가을이 되면서 아름다운 장면을 사진만으로 담아 주고받는 장면에는 생명이 없다. 냄새 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진 속에 내가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접 보고, 풍경 주변의 소리를 듣고, 마르고 진 느낌으로 만질 수 없는 풍경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감흥이 오래가지 못한다. 사물과 소통하지 않으면 풍경이 나를 기억할 수 없고 내가 그 풍경에 오롯이 담길 수 없으므로 체감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헛물이다. 나누고 싶은 감상만 남을 뿐이다. 이런 감상만이라도 소중히 느껴지는 요즘 시절이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다.

‘어차피 감상은 어떤 무기로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에는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 감상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로 사용할 수 없음은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싸우지 않으면 무기도 필요 없지 않겠는가 싶다. 사물과도 소통해야 나만의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 생긴다, 주변의 어떤 사물들, 풍경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낮아진 돌담처럼 스스로 자라나지 못할 것이다.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답답한 방에서 휴대전화 사진으로만 전달받게 된다면 음식 사진을 보며 침을 흘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시절이 하도 수상하여 함부로 걷기도 어렵지만 아주 사소한 주변의 풍경들과 소통하여 글로 남기는 ‘감상’을 가지게 되면 내 마음이 크든지, 사물이 오래 건강하게 남게 될지 모를 일이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으면 왜 아름다운지 함께 짧은 글을 함께 보내주면 ‘감상’이 ‘감성’이 되어 무기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콘크리트 바닥에 고인 빗물에 비친 색 좋은 하늘도 좋고, 건물 벽 모서리에 힘겹게 자라나는 왕고들빼기꽃도 좋다. 봉숭아 꽃잎에 눌린 개미도 그러하고 친구의 등 뒤에 앉은 나비도 좋으니 사진에 ‘감성’이라는 생명을 함께 넣어 소통하면 좋겠다.

풍경을 사진으로만 찍어 두면 이미 풍경은 죽은 것이고 이름 지어 주지 않는 전송만으로는 돌담을 스스로 자라나지 못하게 한다. 가을풍경에 당신이 있어 아름다워, 당신을 생각하면 그 풍경도 멋스러워져, 이렇게 한 가지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은 반드시 함께 나누고 싶은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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