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함께 30년 수산인 박용욱씨

박용욱 대길수산 대표
“바다일이 얼마나 힘들면 ‘도깨비도 뱃놈 흉내는 못 낸다’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박용욱씨(49·동부면 오송리 영북마을·사진)는 30년 가까이 바다와 함께 희망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는 바다 사나이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단잠을 뿌리치고 잠을 깬다. 제일 먼저 박신 작업장을 따뜻하게 만들고 굴까는 아줌마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7시30분 굴양식장이 있는 영북마을 앞 바다로 나간다.

새가(?) 빠지게 굴을 따서 12시30분쯤 그가 운영하고 있는 대길수산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으로 허기를 채우고 박신장에서 굴까는 아줌마들과 같이 굴을 깐다.

오후 5시까지 굴을 까고 피와도 같은 굴들을 통영 굴 수협으로 가져간다. 오후 6시 경매가 시작되지만 거제는 통영까지의 거리 때문에 늘 꼴찌라고 한다.

경매가 시작되면 그의 눈은 중매인의 손가락만 보게 된단다. 굴 값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조바심에서다.

굴을 중매인에게 모두 넘기고 나면 그의 아늑한 집이 있는 영북마을로 돌아온다. 시계바늘은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제 하루 일과를 끝냈다. 다시 요기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무엇을 위해 죽으라고 고생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다시 새벽 4시다.

박씨는 거제수산업고등학교(현 거제제일고등학교) 어업과를 졸업하고, 포항실업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80년부터 배(선망어선)를 탔다.

1986년 옆 마을 가배 아가씨와 선을 보고 결혼했다. “당시에는 집사람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을 많이 했다”고 귀띔했다.

원양어선을 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배만 타면 도지는 위장병 때문에 8년 동안 타던 배를 88년 그만 두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부친과 함께 2백m짜리 5개(0.5㏊)로 굴 양식을 시작했다. 이때 유자 붐이 일어 미리 사 놓은 땅에 유자나무도 함께 심었다.

뭐가 주업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일만 했다. 유자파동을 이기지 못해 1995년 유자밭을 판 돈으로 굴 양식장을 넓혀나갔다. 13.5㏊나 됐다. 지금은 임대해서 하는 것까지 모두 18㏊ 규모다.

부푼 희망을 안고 야심차게 굴 양식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그도 지쳐버렸다. 굴 값이 워낙 없어서다.

오히려 손해를 보면서 계속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빚은 늘어만 가고 굴 값은 해를 더할수록 떨어지고, 중국과의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은 어민들에겐 곧 ‘저승사자’와도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늘 속고 살지만)‘내일은 나아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 하루하루 쉼 없는 바다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정부가 어선감척사업처럼 굴양식장도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줄여줬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작은 바람을 전했다.

도깨비도 흉내 못 낸다는 ‘뱃놈’이기를 자처한 박씨. “오늘 취재 온다고 해서 굴 채취작업을 끝내고 작업장에 와서 대충 씻었는데 사진이 잘 나올지 모르겠다”면서 “남 보기 너무 부끄럽지 않게만 해 달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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