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춘 칼럼위원

납북된 남편을 35년 동안이나 그리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장목면 농소마을 유모(70) 할머니의 사연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려웠던 시절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멀리 백령도와 강원도 삼척 등지로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납북된 어민가족들의 애환서린 안타까운 일이어서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아버지, 남편 또는 아들이나 형제가 하루아침에 강제로 납북당해 억울함은 물론 살아가기도 어려운 형편에 놓였는데 국가와 국민들은 과연 그 동안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가족들은 서운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거제지역 납북어민에 대한 정확한 조사필요

지금까지 거제지역 납북 어민수는 지난 72년 12월28일 백령도 근해에서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된 오대양 61호와 62호에 승선했던 18명으로 알려진 게 전부다.

그러나 납북자 가족모임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1965년 11월30일 행영호 선원 서석면씨(당시 18세)를 비롯 67년 4월12일 천대1호 승선자 최종등씨(당시 25세) 등 모두 26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71년 1월6일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 휘영 37호에는 김상대(당시 28세), 정세율씨(당시 48세) 등 5명의 거제출신 어민들이 승선했다가 함께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72년 8월 일진 6호에 타고 있던 당시 서른여덟의 이석룡씨도 납북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납북자들의 정확한 신상파악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납북자 가족들에 대한 관심은 오죽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납북어민에 대한 정확한 조사로 가족들과 후손들에게 더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들의 관심이 가장 중요
강제 납북된 것도 억울한데 국가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남아있는 가족들을 색안경을 끼고 감시대상으로 삼아왔었다. 큰 힘이 되어 주어야 할 국가나 국민들이 오히려 사상이란 이데올로기에 빗대 이중삼중으로 힘들게 했던 게 사실이다.

납북자 가족 가운데 상당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사상범 가족으로 몰리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고 당시를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에서도 그 아픔을 알 수 있다.

누가 강제 납북돼 북한으로 넘어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본다면 해답은 간단할 것이다. 이 때문에 국군포로 문제와 함께 납북자 문제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개성공단 조성과 수해복구지원 등 북한에 대한 온갖 선심성 정책을 펴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세상의 가장 근본이치인 인간존중의 정신에 입각한 피해자들의 구제가 최우선임을 알아야 한다.

연좌제 아닌 연좌제에 얽혀 고통받았던 가족들에게 국가는 사랑으로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국가에서 베풀 수 있는 사랑은 가족들에 대한 경제적인 보상보다는 지금이라도 정확한 생사여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마항쟁은 부마민주화 운동으로 승화시킨 정부가 유달리 남북문제에 끌려 다니는 것 같은 인상은 아직도 납북자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밖에 없다.

10월 남북정상회담에 큰 기대
남·북한 두 정상이 평양에서 회담을 갖는다는 소식은 납북자 가족들과 국군포로 가족들에게 큰 기대를 갖게 한다.

개성에 공단을 만들어 북한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식량난 해결을 위해 수백만톤의 쌀을 공급해 주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도 반드시 필요한 요구를 해야 할 것이다. 핵 폐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시 돼야할 과제는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 사람과 관계된 일임을 국가는 명심해야 한다.

납북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목면 농소마을 유모 할머니의 사연이 납북 남편을 그리다 숨진 안타까운 사부곡으로만 들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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