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배우는거제역사]거제의 구비문학 11

거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좁은 해협이 견내량입니다. 1971년 거제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룻배를 타고 통영과 거제를 오고갔던 뱃길로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오거나, 섬에서 육지로 나가야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중심지였습니다. 불과 300m 정도의 좁은 폭이지만 물살이 거센 탓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크게 승리한 한산대첩이 있었던 곳입니다.

견내량(見乃梁)이라는 이름이 생긴 데는 유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높은 벼슬을 했던 양반이 거제도로 귀양을 오게 되었습니다.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거느린 노비도 많아 편안하게 지내다가 혼자 떨어져 사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한양 양반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에 늘 바다에 나와 육지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저 바다만 건너면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갈 수 있을텐데…."

한양 양반은 넘실거리는 바다가 야속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양반은 매일 같이 바다에 나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양반 체면에 헤엄을 칠 수도 없었고 더구나 남의 배를 훔쳐 타고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들보 한 개만 걸치면 건너갈 수 있는 지척의 길을 두고 이렇게 쳐다만 보고 있다니…."

그래서 사람들은 한양 양반이 대들보 하나면 걸치면 육지로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넋두리 때문에 견내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에 시렁에 걸치는 들보를 한자어로 양(梁)이라 합니다. 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리는 의식을 상량식(上梁式)이라 하지요. 양(梁)은 들보라는 뜻도 있지만 '징검다리·교량·다리' 등의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견내량을 비롯해 남해안의 섬에는 양(梁)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습니다. 노량·명량·칠천량·사량 등인데 공통점은 '양(梁)'자가 붙은 지명은 임진왜란 때 주요 해전의 배경이 된 곳이며 이곳은 모두 육지와 육지사이에 끼여 있는 좁고 긴 바다로 물길이 매우 거센 곳이지만 지금은 거의 다리가 놓여있습니다. 훗날 다리가 놓일 것을 예상하고 이름을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견내량을 전하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려 18대 의종왕(毅宗王) 24년(1170), 문신들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 대장군 정중부(鄭仲夫)를 비롯한 무신들이 난을 일으킵니다.

무신들은 그동안 받은 수모를 앙갚음하기라고 하려는 듯 눈에 가시 같았던 문신들을 죽이고 왕까지 폐위시킵니다. 그때 의종왕은 왕위를 빼앗기고 거제도로 귀양을 오게 됩니다. 의종 일행이 통영까지는 수레에 실려왔지만 거제섬에 들어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물살이 세고 물길이 빠른 바다를 작은 배로 건너야 했습니다. 태어나 한 번도 위험한 일이나 어려운 일을 하지 않았던 왕이라 보잘 것 없는 나룻배에 몸을 실으려고 하니 무서워서 쉽게 타지 못했습니다.

"전하, 어서 이 배에 오르십시오. 비록 작은 배지만 이 배를 타야만 거제도로 갈 수 있습니다."

귀양길에 함께 따라나선 신하들은 의종왕께 너무나 송구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그래도 일국의 왕이었는데 쫓겨나 귀양을 가게된 것만 해도 분통이 터질 일인데, 겨우 몇 사람 탈 수 없는 작은 배에 몸을 실어야 하는 처지가 정말 속상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얼마되지 않는 거리지만 배를 처음 타본 터라 죽을 고생을 다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둔덕면 우두봉에 정착해 고려촌을 이루면서 3년간 살게 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견내량을 '임금님이 건넜다'고 해서 '전하도(殿下渡)'라 부르게 됐습니다.

정리: 윤일광 논설위원(자료: 거제교육지원청 '거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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