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은 육전에서는 계속 이겼지만 반면 해전에서는 싸울 때마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하여 전선 및 병사의 손실이 막대했습니다. 그들은 남해 연안을 시작으로 서해바다를 우회하여 한강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빚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내륙지방은 조령, 추풍령 등 험준한 산악이 많아 군수품 보급로로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서해로 잇는 바닷길을 확보하려 했으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있는 바다에서 왜군은 연전연패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인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노하여 서해 돌파 없이는 침략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판단아래 수륙양면의 새로운 공격부대를 재편성하여 왜의 육군과 해군을 모조리 남해바다 싸움에 참가시켜 조선 수군을 쳐부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바다를 장악하기 위한 조선수군과 왜군의 피할 수 없는 일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1592년 7월 5일 거북선을 비롯한 49척의 배를 이끌고 여수를 출발하여 7월 6일 남해 노량에서 원균 장군이 이끈 7척과 합류하여 7월 8일 견내량에서 충무공이 이끄는 우리 수군과 일본군 수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견내량은 섬과 육지를 잇는 지금의 거제대교가 있는 바다입니다. 이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鶴翼陣) 전법으로 크게 이겼습니다. 학익진이란 학의 날개 모양으로 펼쳐 공격하는 전술입니다. 적선 74척 중 57척을 격침시키고 대부분의 왜군을 수장시키는 해전사상 최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리한 후 임금에게 올린 장계(보고서)에 그때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는데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습니다. 왜적이 비록 육지에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배) 5, 6척으로 하여금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뒤쫓아서 공격할 기세를 보였더니 여러 배의 왜선들이 한꺼번에 돛을 달고 쫓아 나왔습니다. 우리 배는 일부러 물러나는 척하면서 돌아 나오니 왜선이 줄곧 뒤쫓아 나왔습니다. 바다 가운데로 나와서 다시 여러 장수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려호각을 불면서 학익진을 펴고 일제히 적을 향하여 진격하여 한꺼번에 다 해치워 버렸습니다.

견내량 해전을 지휘하던 일본 장수는 겨우 14척의 배와 함께 도망갔습니다. 7월 9일에는 안골포(진해)에 숨어 있는 왜적의 배 42척을 쳐부수었습니다. 이 견내량 해전과 안골포 해전의 승리로 남해바다의 해상권을 우리 수군이 거머쥐게 되었고, 서해바다 쪽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후로 왜적은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했고 이순신 장군은 그들에게 크나큰 두려움의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견내량 해전을 한산대첩이라고도 합니다.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이며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가 해전과 더불어 세계4대 해전으로 손꼽히면서 세계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습니다.

정리 : 윤일광 논설위원(자료제공 : 거제교육지원청 ‘거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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