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권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시키자마자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얼토당토않게도 ‘명나라를 치려 갈 테니 길을 비켜 달라’고 트집을 부렸지만 나라에서는 들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 선조임금 때인 1592년 4월13일 저녁 7시, 20여만 명의 왜군을 앞세워 갑자기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 해가 임진년이었기 때문에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부릅니다.

나라에서는 전쟁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더구나 우리 군대는 활이나 칼 같은 재래식 무기였지만 왜군은 조총이라는 신식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부산성과 동래성이 차례로 무너졌고 불과 20여일 만에 한성(지금의 서울)까지 빼앗기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선조임금은 1592년 전라도의 바다를 지키고 있던 이순신 장군에게 급히 명령을 내립니다.

“그대가 원균 장군과 힘을 합하여 바다에서 적선을 쳐부순다면 왜군은 육지로 올라올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있을 것을 예감하고 항상 빈틈없는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나라의 부름을 받자 1592년 5월4일 첫닭이 울 때, 여수에서 85척의 배를 이끌고 출전의 북을 울렸습니다. 5월6일에 6척의 배를 이끌고 온 원균 장군과 송미포(지금의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에서 하룻밤 지내고 5월7일 정오 쯤 왜적이 진을 치고 있던 옥포앞바다에 닿았습니다.

“덤벙되지 말고 태산처럼 침착하라!”

하고 이순신 장군은 여러 장수들에게 엄하게 명령한 뒤 일제히 돌진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기막힌 전술로 왜적선 42척을 쳐부수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첫 번째 승리는 바로 우리고장 옥포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옥포대첩으로 일본군은 통신과 보급로를 차단당해 육상진출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거제(巨濟)’라는 말에는 ‘크게 구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도 우리나라를 크게 구한 자랑스러운 땅임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시조시인 이은상 선생님께서는 옥포대첩을 시로 잘 나타내셨는데 이 시는 옥포 여객선 터미널 옆 돌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한바다 외로운 섬 옥포야 작은 마슬
고난의 역사 위에 네 이름 빛나도다
우리 님 첫 번 승첩이 바로 여기더니라.
창파 구비 구비 나르는 저 갈매기
승전고 북소리에 상기도 춤을 추니
우리도 자손만대에 님을 기리오리다.

정리 : 윤일광 논설위원(자료제공 : 거제교육지원청 '거제의 꿈')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