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여의고 40년 간 5남매 키운 김정순 할머니의 '봄'

시장 좌판에서 억척같이 살며 남몰래 베푸는 이웃사랑

거리에서 손님들을 만난지 40여년.

30대 중반의 여성은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팽팽했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졌고, 꼿꼿했던 허리는 어느새 구부정해져 버렸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한겨울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고현시장 좌판을 지키는 김정순(74·고현동) 할머니.

지나온 세월,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후회는 없다고 한다. 온갖 채소가 가득한 할머니의 좌판은 지역민의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할머니의 좌판보다 더욱 풍성한 것은 이웃을 위한 마음 씀씀이.

지역 경로당과 파출소 등을 찾아 할머니의 땀이 어린 소중한 돈을 전달하고, 매년 사랑의 열매 모금함에 적지않은 돈을 쾌척하고 있다. 5남매의 어머니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녹록하지 않은 현실에 굴하지 않고 여장부의 삶을 살아온 '진주할매'의 주름진 이마 위로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5남매 두고 떠난 남편, 서른중반에 가장이 됐다

진주에서 옥수동 시장까지 '원정 좌판'으로 생계
아이들 바라보며 트럭서 쪽잠, 여장부 '진주할매'

40여년 전, 한 여인의 가슴은 텅 비어 있었다. 믿고 의지하던 남편의 죽음 앞에 머리 속도 새하얗게 변했다. 5남매를 키울 생각에 눈앞이 막막했다. 농사일로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작정 진주에서 좌판을 시작했다. 1970년대 초, 여인의 나이 30대 중반이었다. 쑥을 뜯고, 정구지(부추)를 다듬어 시장에 나갔다. 좌충우돌, 악착같은 삶이 시작됐다.

목청 높여 "물건이 싸고 좋으니 사가세요"라고 외쳤다. 장사수완이 있었는지 물건이 제법 팔려나갔다.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한 아저씨가 그녀를 찾았다. 사과를 대줄테니 한 번 팔아보라고. 그럴만한 돈이 없다고 하자 외상으로 물건을 대주겠다고 했다. 집안에 있는 돈을 싹싹 끌어모아 당시 동명극장 뒤에 월세로 가게를 냈다.

가게라고는 하지만 일종의 더부살이였다. 2평이 채 되지않은 작은 공간에 사과가 채워졌다. 장사를 시작하자 손님들이 들끓었다. 특별히 목이 좋은 곳도 아니었다. 장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처음 하루 3박스만 들어오던 사과가 5박스에서 7박스, 10박스로 점점 늘어갔다. 하지만 5남매를 키우기에는 버거웠다.          

다람쥐 쳇바퀴 같았던 일상, 우연찮게 들렀던 옥수동 시장에서 좌판의 물건들이 진주보다 비싸게 팔리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부터 거제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1990년대 초였다.

매일 새벽 버스를 타고 진주에서 옥수동으로 넘어와 노점상을 했다. 물건을 짊어지고 와 팔았다. 하지만 버스에 실을 수 있는 물건에는 한계가 있었다. 큰맘 먹고 1톤 트럭을 빌려 날마다 옥수동으로 '원정좌판'을 벌였다.

장사가 잘됐지만 잠 잘 시간은 거의 없었다. 밤 12시에 일을 끝내면 진주로 향했다. 새벽 2시쯤 도착해 물건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잠시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시 옥수동으로 향했다. 차안에서의 쪽잠이 휴식과 수면의 전부였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쉴 틈이 없었다. 태풍이 부는 날에도 장사를 했다. 명절과 제사 때만 잠시 일손을 멈췄다.

그러던 어느날 시청이 장승포에서 고현으로 이전했다. 장사가 되질 않았다. 고현으로 인구가 몰리면서 상권이 확 죽어버렸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였다.

어느때 쯤인가 거제로 이사를 온 할머니는 옥수동 생활을 접고 고현시장에 좌판을 깔았다. 그때가 2001년. 그녀의 나이도 60을 넘긴 때였다. 자식들 모두 장성해 굳이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아들과 딸, 며느리가 장사를 그만두고 편하게 지내라며 성화였다. 하지만 집에서 쉬면 온몸이 아팠다. 말리는 자식들을 뒤로하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시장으로 향했다.

물건을 받기위해 새벽 3시쯤 출근도장을 찍었다. 하루종일 물건을 팔다 저녁 10시를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좋은 물건을 받아 다른 상인들보다 싸게 팔았다. 장사가 본 궤도에 오르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장사를 하면서도 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나라 땅에서 맘대로 장사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구세군 냄비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장사를 끝내고 도착한 집. 이웃돕기 성금으로 얼마를 낼까 고민했다. '그래, 지금껏 국가의 땅을 마음대로 썼으니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 베풀자'고 다짐했다. 다음날 아침, 그녀의 손에 현금 30만원이 든 봉투가 들려있었다.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고 돌아섰다. 기분이 상쾌하면서도 묘했다.

고현파출소도 들락거렸다. 과일을 싸들고 무작정 들어가 드시라고 했다. 인근 경로당에도 갔다. 술 한 잔씩 사먹으라고 20만원을 건냈다. 힘들 게 모은 돈이었지만 마음은 더 따뜻해졌다. '남에게 베푸는 일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줄이야.' 타인에게 베푸는 일에도 재미가 붙었다. 나눔으로 조금씩 채워져 가는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을 때꺼정 일도 하고 남들과 함께 살랍니다." 고현시장 좌판에서 '진주할매'라 불리는 그는 올해 일흔넷의 김정순 할머니다.

"자식들이 장사 그만하고 여행이나 다니며 편히 지내라고 하지만, 일하는 게 몸에 배 버렸어. 일을 안하면 온몸이 아플 정도니까. 장사를 하면 돈을 벌어야 손주들 용돈도 주고, 다른 이웃들에게 베풀 수가 있자. 죽을 때까지 일을 하고 살아야 할 팔자인가 봐."

좌판에 진열된 채소를 다듬으며 덤덤히 말하는 김정순 할머니.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자식들 공부시키기 위해 시작한 노점상 생활이 벌써 40년이 다 돼 간다.

할머니의 영업철학은 '박리다매'. 좋은 물건을 가져와 싸게 판 것이 오늘의 할머니를 있게 했다.

"다른 노점에서 파는 1,000원 어치가 내가 팔면 700원정도 해. 남보다 조금 더 싸게 팔아야 많이 팔 수 있고, 많이 팔면 그만큼 수익도 올라오지. 물건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내 주머니를 먼저 채운다는 생각을 하지말고 손님들에게 주는 물건이 많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11년 동안 고현시장 좌판을 지키다 보니 단골들도 많아졌다. 고향이 진주라서 '진주할매'라 불리는 김 할머니. 노점을 시작하면서 죽을 각오로 임했다는 할머니는 요즘 손자들 용돈 주는 재미와 이웃에게 베푸는 삶에 푹 빠져 있다.

"명절에 손주들이 오면 내가 용돈을 줘. 할머니가 돈을 주니 손자들이 나를 너무 좋아해. 이웃돕기 성금이나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는 일도 한번 해보니까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내친 김에 경로당에도 찾아가 술 한 잔씩 하시라도 얼마씩 드렸어. 늘 마음속에 '국가 땅을 마음대로 쓰면서 아무것도 안해도 되나' 하는 걱정같은 것이 있었지. 이제야 오래된 외상을 갚아가는 기분이야. 내가 번 돈이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지."

오랜 노점생활 탓인지 허리에 이상이 왔다. 아픔을 참으며 일을 계속했지만 더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얼마전에는 한 달 넘게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자식들이 제발 일 좀 그만두라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할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선천적으로 멀미가 심해. 지금 생각해보면 예전에 진주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어떻게 장사를 했는지 모르겠어. 자식들이 외국으로 관광 보내준다고 하는데 멀미가 나서 도저히 엄두가 안나. 이젠 장사가 숨 쉬는 것만큼 편해."

노점을 하며 어린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일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는 김 할머니. 자식들을 위해 시작한 장사였지만, 제대로 먹이지 못해 늘 걱정이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자녀들에게 전해진 것일까. 이미 훌륭하게 장성한 5남매는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나이도 나이지만 좌판에 앉아 있는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허리도 구부정해져 버렸어. 하지만 괜찮아. 아직 살만 하니까. 몸이 말을 안들을 때까지는 일을 계속 해야지."

봄이 왔지만 아직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좌판 앞에 쪼그려 앉아 오가는 손님과 말을 주고받는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사람사는 세상'도 가슴 진하게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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