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섭 전 언론인

조선시대에는 현대의 인사청탁금지법 성격의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이 있었다.

이 법은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시행한 법으로 적발 시 멀리 지방으로 귀양 보내고 평생 벼슬을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부정부패 방지법이었다.

정종 1년(1399년)에 제정된 이 법은 고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지인끼리 서로 어울려 다니면서 벼슬을 주고 받고 파당을 만들면서 비롯됐다는 판단 하에 제정됐다. 태종을 거쳐 성종 때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에 성문화 됐다.

정삼품 이상 당상관 사헌부 및 사간원 관리들의 경우 친가 8촌, 외가 6촌 밖의 사람을 사사로이 집에서 만나다 발각되면 이유 불문 '분경'으로 간주, 처벌했다. 처벌의 정도는 곤장 100대에 3000리 밖 귀양길이었다.

이법은 왕실의 종친과 공신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당대의 권신 신숙주, 예종의 사촌 귀성군 이준도 곤욕을 치뤘다. 그만큼 조선조의 국왕들은 '분경'에 대해 엄격했다.

이것은 왕권과 직접 관련된 일이라고 여겨 더욱 그랬다. 그래서 권력을 놓고 힘있는 재상들과 왕과의 신경전이 끊임없었다.

성종 1년(1470년) 한명회와 신숙주는 분경금지법을 철폐해 달라고 요구했다. 분경금지령이 너무 엄해서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사람과도 상통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어린왕은 원로 재상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는 원상들의 권력이 막강한데도 분경을 금하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면서 연일 상소를 올렸다. 조선조 7대 세조의 왕비 윤대비도 '분경'에 연류 돼 창피를 당했다.

성종 6년(1475년) 승정원 담벼락에 익명서의 글이 붙었다. "강자평이 진주 목사가 된 것은 대왕대비의 특명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대해 윤대비는 진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부모가 일찍 돌아갔으므로 내가 형제를 보고 싶어 했을 뿐 사적인 청을 받지 않았다." 이렇듯 대왕대비도 진땀을 흘릴 정도로 '분경'은 엄하게 적용됐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 법과 질서는 눈에 가시같은 대상이다. 그래서 편법으로 등장한 것이 소위 '합부인(閤夫人)'이다.

탐관오리들은 정실부인을 내세울 수 없으니 이 합부인(閤夫人)을 통해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원래 합부인(閤夫人)은 남의 아내를 높여서 일컫는 말이었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그 뜻이 변하였다.

'합부인(閤夫人)'은 정실부인이 아닌 첩(妾)이다. 첩(妾)은 사사로이 바깥출입이 자유로우니 분경금지법의 사각지대를 교묘히 파고들 수 있었다. 청탁의 대상자들을 집안에 끌어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면담할 수 있었다.

'합부인'으로 유명한 여인으로 나합부인과 정난정이 있었다.

나합부인은 철종때 안동김씨 김좌근의 소실이었다. 민심은 비웃음을 담아 나주기생출신 여인을 '각하'라는 뜻의 합자를 붙혀 나합부인이라고 불렀다. 나합부인은 지방수령 자리를 적게는 2~3만냥에서 많게는 수십만냥을 받고 거래했다 한다. 조선조 매관매직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중종비(제11대) 문정황후의 동생 윤원형의 첩 정난정의 뇌물 챙기기 수법 또한 나합부인에 버금간다. 10년간 부정축재 결과 서울에만 16채의 대저택이 있었다 한다. 수 만석 소출의 토지는 말할 것도 없고 수백만 금의 재산을 끌어 모았다 한다.

국회의원 윤영 부인이 지난 6.2 지방선거와 관련 공천헌금 수수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정실부인이 체면도 없이 조선조때 첩이 일삼던 현대판 합부인(閤夫人) 행세를 한 셈이다. 거제시 정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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