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섭(전 언론인)

<등장인물>
윤영태상 - 대표무공 : 행정고시공, 직위 : 거제무림태상.
한겸도장 - 대표무공 : 화무십일공, 직위 : 전 거제무림맹주.
종 식 검 - 대표무공 : 사자후파란공, 직위 : 전 중원수로연맹총수.
한 표 검 - 대표무공 : 건곤일척도, 직위 : 전 거제무림추포대장.
진성율사 - 대표무공 : 강호민원공, 직위 : 전 중원감찰검사.

삼각무림(三角武林).
당금의 거제무림은 그렇게 표현되고 있었다. 세 개의 기둥이 떠 받들고 있는 무림이라는 의미였다.

한나라방으로 대표되는 보수무림, 노동자들로 구성된 진보무림, 중간지대에 속한 중도무림으로 천하가 삼분돼 있는 것이다. 오늘의 적이 내일은 친구가 되고 내일의 친구는 그 다음날이면 다시 적이 될 만큼 어지러운 국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원인은 정사(正邪)간의 오랜 대립에서 비롯됐다. 60여년을 이어져 내려온 양측의 갈등은 세월이 흐를수록 풀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도를 더해가는 추세이다.

흑풍혈우(黑風血雨)에 몸서리치는 거제무림(巨濟武林).
거제무림이 충격과 공포로 인해 술렁이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황금무력공(黃金武力功)’의 추문에 전 무림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그 추문의 중심에 윤영 태상맹주의 사모(師母)가 있었으니 그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더구나 한나라방 거제시 지부 사무단 단주로 있던 손모 무사의 증언이 있은 후 강호 무사들은 경악과 전율에 사로 잡혔다.
  무사들의 경악은 사모(師母)가 손모무사에게 2억냥의 뇌물을 요구했다는 믿기지 않은 사실과, 힘들게 1억냥을 갖다 바친 심복무사마저 황금을 기준으로 비무대회 출전자격을 가늠했다는 점에서 충격이 엄청났다. 무사들의 전율은 특히 한나라방 무사들에게 더했다. ‘황금무력공’의 추문을 인지한 중원무림 감찰단의 천라지망이 거제무림 전체를 뒤덮음과 동시에 무림 민심이 한나라방을 떠나는 체감이 하루가 다르게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런일들이?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혹여 자신들이 흑풍혈우(黑風血雨)에 휩쓸릴까봐 전전긍긍 하면서도 아직 긴가민가 하고 있었다.

화원(花園).
무림에 혈풍이 몰아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원은 고요했다. 곳곳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각기 이름이 다른 수많은 꽃들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뒤 섞인 채 아무렇게나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주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정성이 깃든 한 손길이 버려진 화원을 다듬어 가고 있었다.
  “자두연두기(煮豆燃豆?) 콩깍지가 콩을 볶누나
   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 솥속의 콩은 울고 있다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 원래 한 뿌리에서 났는데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 어찌 이리도 급하게 볶아대는가“
  조식의 칠보작시(七步作詩)다. 조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조비가 동생 조식의 능력을 시기해 죽이려 하자 조식이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육친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비유한 시(詩)이다.
  한명의 중년인이 시를 읊은 뒤 혀를 차며 꽃이 핀 자리에 듬성듬성 자라있는 잡초들을 뽑고 있었다. 일신에 걸치고 있는 의복은 남루한 회색빛 장삼이었고 검은 수염이 가슴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 그의 나이는 대략 육십여세. 태산같은 웅대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눈에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분노가 일고 있었다. 전 거제무림맹주, 한겸도장 이었다.
  그가 조식의 칠보작시를 읊은것은 지난 유월 무림맹주 출전권을 두고 자신을 핍박했던 윤영 태상맹주에 대한 서운함의 표시였다. 그리고 혀를 찬 것은 최근 강호 추문의 중심에 서있는 윤영 태상맹주를 향한 비아냥이었다.
  잠시 후 백의, 청의, 홍의를 입은 청장년 무사 이십여명이 아무 기척도 없이 잡초를 뽑고 있는 한겸도장의 뒤에 시립했다. 모두들 일신에 극강의 무공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한겸도장은 입도 열지 않고 전음으로 물었다.
  “준비는?”
  홍의를 입은 송모가 답했다. 무리 중 우두머린 듯 했다.
  “9개 면과 고현성, 옥포성 일대 200여 정예무사들에게 밀지를 전달했나이다.”
  “그 다음은?”
  “구체적 지침으로 내년 4월 무림대전이 열릴 것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라 지시 했나이다.”
  “연대는?”
  “중원무림의 현철공자 지지무사들과 큰줄기를 잡고 있나이다.”
  “저쪽은?”
  한겸도장이 저쪽이라 함은 현 거제무림 맹주인 민호검 쪽의 동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흑의의 한 청년검사가 말을 이었다.
  “내년 보궐선거는 사실 무근이라는 소문을 각 지역마다 전서구를 통해 조직적으로 전파하고 있나이다.”
  “.......”
  “이에 맞바람으로 대처하고 있는 우리측의 주장에 몹시 흥분하고 있나이다.”
  “.......”
  “꼭 소금맞은 미꾸라지처럼...”
  청년 검사의 표현이 우스운지 한겸도장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헛, 헛, 허”
  “소금맞은 미꾸라지라... 거참, 표현한번 걸쭉하구만”
  잠시 너털웃음을 짓던 한겸도장의 얼굴에 갑자기 비장함이 흘렀다.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
  “건곤일척! 마지막 승부다”
  “.......”
  “본좌에게는 다음은 없다.”
  “.......”
  “가서 전해라, 죽음을 각오하라고!”
  “존명(尊命)!”
  “존, 존명(尊命)!”
  한겸도장의 밀지를 받은 이십여 무사들의 신형은 대금산, 노자산, 계룡산, 앵산, 망산 등지로 삼삼오오 날라갔다.

홍화루.
고현성 중심에 자리 잡은 무림 최고의 객잔이다. 평소 이곳은 무척 조용하고 한가로웠는데 요즘 따라 적지 않은 방문객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모옥 주변으로 십여명의 강호인들이 낮은 음성으로 뭐라 얘기를 하고 있다.
  승(僧), 도(道), 속(俗) 등 그들의 신분이나 복장은 다양했다.
  그 중 한명이 주위의 눈치를 보며 화제를 주도했다.
  “소문 들었는가?”
  “.......”
  “윤영태상 사모가 무차별 ‘황금무력공’을 펼치다 중원 감찰단에 추포된 사실.”
  속가(俗家)의 한 인물이 말을 받았다.
  “어제 축시(丑時)에 전서구가 날았더구먼. 근데 그게 사실인가?”
  “윤영 태상이 일전에 황금 1냥이라도 받았다면 태상자리를 내 놓겠다고 호언장담 하지 않았는가?”
  “글쎄 말이야...” 한 속인(俗人)도 거들고 나섰다.
  “본인은 안 받았을 수도 있지.”
  “음, 그럴 수도 있겠구먼.”
  이들의 속삼임을 지켜보던 한 도인(道人)이 일갈했다.
  “이놈들아! 그걸 말이라고 뱉어내나. 주머니 돈이 쌈지돈이라는 말도 몰라!”
  “하긴.”
  머쓱해진 속인들은 머리를 끄적거렸다.
  도인의 말이 계속됐다.
  “무림에서 비무때만 되면 ‘황금무력공’이 야음을 틈타 횡행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허나 이번건은 그 수법이 강호의 잡배들보다 못하다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
  “.......”
  “세상에... 자신이 부리던 동지요, 개인적으로 보면 고향 선배요, 서당 선배가 아닌가.”
  “.......”
  “특히나 그 손모라는 그 무사는 거제무림맹 사무관 출신 아닌감?”
  “.......”
  “무림경력이나 경륜, 기여도로 볼때 무림의회 의원 후보로서 손색이 없지 않았는가?”
  “.......”
  “무림맹 출신 그런 사람한테 무슨 황금이 있다고...2억냥이나 요구하다니 하늘이 울고 땅이 울것네 이사람들아!”
  “.......”
  “과거 봉조공이나 금춘노인 시대에 이런일들이 있었는가?”
  “.......”
  “봉조공은 자신들의 가신들에게 비무대회 때마다 오히려 ‘황금무력공’을 전수해준걸로 나는 알고있네.”
  “.......”
  “원, 거제무림이 우째 이렇게 되었을꼬...”
  도인의 분노를 지켜보던 승(僧)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러 나왔다.
  “아미타불... 옴마니반메홈...”
 
  이층누각에는 청장년무사 넷이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거제무림 첩보단 기자들이었다. 한 기자의 입에서 단호한 음성이 뱉어져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발본색원, 황금무력공으로 거제무림에 발붙이려는 잡배들을 영원히 추방해야 해!”
  “.......”
  “그런 넘들이 있으니 정통무공을 익힌 꿈나무들이 제대로 크지를 못하는거야.”
  흥분하고 있는 한 기자를 향해 다른 한 기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정말 이번에 일망타진 될까 의문이네 그려”
  “이 사람아, 선거전부터 ‘황금무력공’ 혐의로 가택수색이니 계좌추적이 난리 부루스를 쳤는데, 일망타진 안하면 중원 감찰단의 꼴이 뭐가 되겠나”
  다른 기자가 끼어들었다.
  “맞는 말이네, 절대권력 황실무림을 등에 업고 있는 한나라방 태상과 한나라방 거제무림맹주 후보에게 중원 감찰단이 아무 근거도 없이 일을 도모하지 못했을 것이네.”
  “.......”
  “내가 들은 믿을 만한 중원 소식통에 의하면 이번일은 중원감찰단의 명예를 걸고 하는 작업으로 감찰총수의 재가까지 난걸로 알고있네.”
  “.......”
  “또한 한나라방 총단에서도 진상규명을 철저히 하라는 지시를 하달 했다는구먼.”
  미심쩍어 하던 기자는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어째 꽹과리 치고 나서 도둑을 쫓는것 같아”
  “.......”
  “처음부터 기습적으로 들이 닥쳐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
  “전두환, 노태우, 박연차 비자금까지도 낱낱이 털어내던 감찰단이 아니었던가?”
  “.......”
  “근데 수개월동안 전문계좌 추적팀까지 동원해도 아직 꼬리하나 잡지 못하니 아무래도 이상해.”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는 청년기자를 향해 좌장격인 중년기자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기다려보게. 황실무림 수뇌부의 하명이 없었다면 감찰단이 저렇게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내가 들은 정보로는 감찰단이 추적의 실마리를 잡고 증거보강에 들어간 걸로 알고있네.”
  “.......”
  “그건 그렇고 이게 무슨 망신인가. 중원무림 전역에 비리지역이라고 전서구가 날라다니고 참으로 개망신야, 개망신!”
  중원무림 감찰단 통영지부.
  지하석실에 네명의 검사가 모였다.
  그들 눈앞에는 양피지가 수북히 쌓여있다. 그들은 거제무림 윤영 태상맹주와 그 수하들의 비행을 세세히 분석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탁자의 중심에 있는 자가 가장 눈에 뛴다. 일신에 백의를 입은 그는 언뜻 보기에도 깨끗한 얼굴에 차가운 인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백의 검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결과를 말해보라!”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섯명이나이다.”
  안광이 형형한 수석검사가 답했다.
  “여섯명이나 된다고?”
  “그렇나이다. 거제무림 태상맹주, 사모, 무림맹주, 도의회 무사 2명, 시의회 무사 1명 등 이옵나이다.”
  “그외 다른자는 없나?”
  “서너명 있지만 피라미들이라서 아직 손을 안대고 있나이다.”
  백의 검사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현재 진행사항은?”
  “6명의 계좌추적 결과 꼬리가 잘 잡히지 않고 있나이다.”
  이때 백의검사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갈!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건가. 전국 무림대회 전부터 가택수색, 계좌추적 모든 수단을 다 썼건만 아직도 꼬리를 잡지 못했단 말인가?”
  “.......”
  “무슨일을 이 따위로 하는건가!”
  “.......”
  “이러고도 중원무림 검사라고 할 수 있는건가!”
  “.......”
  “그래 그자들이 황금무력공을 무차별 쏘아댄게 맞긴 맞는건가? 사실대로 말해보게.”
  “.......”
  세 명의 청년검사는 한동안 말이 없다.
  “어허, 말들을 해보게”
  심했단 생각이 들었는지 백의 검사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30대 초반의 한 검사가 입을 열었다.
  “심증은 충분하나, 아직 정확한 물증은 없나이다. 국세청, 대검찰단 계좌추적 팀까지 동원했으니 곧 꼬리가 잡힐 겁니다.”
  백의 검사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거제무림 사태를 중원 검찰단은 물론, 한나라방 총단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네, 그 윗선은 말할것도 없고....”
  “.......”
  “이것은 우리 검찰의 명예회복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적발해야 하네. 명심들하게!”
  “존명(尊命)!”
  세명의 검사는 허리를 숙였다.
  “지금 현재 드러난 혐의는 무엇인가?”
  그동안 말없이 경청만 하고 있던 홍안의 검사가 입을 열었다.
  “거제무림맹주 100만냥 기부건, 윤영태상 사모 뇌물 2000만냥 수뢰, 2억냥 모의건, 이와 관련된 도의회 무사 뇌물 2000만냥 청탁건 등 모두 3건은 확실하나이다.”
  백의 검사의 미간에 실망이 역력했다.
  백의 검사는 “으음” 한차례 신음을 토한 뒤, “그것 가지고 안돼!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을 울릴 듯 요란만 떨고 쥐새끼 한 마리 잡아서야 되겠나. 감찰단의 비전무공을 모두 써서라도 반드시, 반드시 ‘황금무력공’의 실체를 밝혀내게!”
  “존명(尊命)!”
  “존명(尊命)!”
  “존명(尊命)!”
  세 검사의 얼굴에는 비장한 기운이 흘렀다.
  거제무림맹주 자리를 놓고 강호가 술렁이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또 다른 기류가 세 명의 잠룡(潛龍)들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었다.


꿈틀대는 잠룡(潛龍)들, 무림제패를 위한 은밀한 포석.
한표검.
거제무림사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다. 그가 남긴 전설이 있으니 그것은 백팔 검기가 펼쳐지는 ‘건곤일척도(乾坤一擲刀)’ 였다.
  스스로 강자라 여기는 자, ‘건곤일척도’를 만나지 마라. 자신을 불괴지신(不壞之身)이라 여기는 자도 ‘건곤일척도’를 피하라, 신상에 이롭다. 항간에 이런 경구가 나돌 정도로 그는 유명했다. 약관에 출도하여 숱한 무(武)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던가? 한표검 앞에서는 적어도 도(刀)에 관해 논하지 못한다. 강자를 자처하는 자들의 살을 가르고, 강철같은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의 뼈를 갈랐다는 그의 도법은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라 칭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2008년 총선 무림대회에서 한나라방 윤영 후보를 천초 접전 끝에 보기 좋게 이길 정도였다. 비록 부재자 대회에서 졌지만.....
  따라서 4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초야에 은거하고 있지만, 그의 명성만은 아직도 무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었다.
 
또다른 잠룡(潛龍)이 꿈틀대고 있었다.
남부마을 병대도 뒤 편에는 기경(奇景)이 펼쳐져있다. 쿠르르르- 그곳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 그 너머 항아리 모양의 분지에 작은 초옥이 있다. 백발이 성성한 일광이 무심한 백삼노인 일곱이 좌정해 있다. 전 중원수로맹 총수 종식검이 공손하게 시립해 있다. 종식검은 과거 10여년동안 중원무림의 바다, 강, 하천을 지배하면서 해신(海神)으로 불리었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
  “무엇 때문에 왔는가?”
  “.......”
  “소생은 천하를 얻고자 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곱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종식검의 등에는 식은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다. 한식경 흘렀을까, 한 노인이 우수를 들어 종식검을 향해 내공을 쏘아 보낸다. 종식검은 혼신의 힘을 다해 진기를 끌어 올려 막아낸다. 종식검의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장삼자락을 적신다.
  노인은 자신만 알듯 혼자서 중얼거린다.
  “대기(大器)는 대기(大器)다. 천하를 담을 만하군!”
  잠시후 자신의 선단에 도착한 종식검. 대마도 쪽을 향해 ‘사자후 파란공’을 실어보낸다.
  우- 우- 우- 갑자기 해일이 일면서 광풍이 몰아친다. 갑판에 도열해있던 수백여 휘하 무사들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자신의 공력을 시험하던 종식검은 진기를 거둬들이고 준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하달했다.
  “타초경사(打草驚蛇). 숲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지마라!”
  “.......?”
  “현 거제무림의 정세는 귀하들도 잘 알터, 허나 경거망동해서 일을 그르쳐서는 안될일.”
  “.......?”
  “태상과 맹주를 자극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잠정적으로 본좌의 우군, 그들의 심기를 절대 건드리지 마라!”
  “.......”
  “특히 태상과 본좌는 어려울적 눈물의 술잔을 기울였던 사이, 한나라방 무사들에게 말한마디라도 다정하게 대하라.”
  “.......”
  “허나, 준비해야 할 것은 절대 소홀함이 없도록!”
  종식검의 하명을 받은 수백여 수로맹 무사들은 빠른 속도로 바닷물을 헤치며 해금강, 다포, 지세포, 옥포만, 거제만 등 거제무림 각 포구로 헤엄쳐 나갔다.

그로부터 1주야 후, 계룡산 정상에 절정고수 두명이 정좌해 있다.
그들의 자세는 묘했다. 거의 맞붙어 있다시피 한 채 왼손을 마주잡고 있다. 아마 오른손이라면 반가워 악수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러나 다정하게(?) 깍지를 끼고 있는 왼손에 반해 오른손은 각기 상대를 향해 내공을 쏘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의 눈도 서로를 노려보며 눈썹하나 까닦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서로의 무공을 시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세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실제적으로 그들 사이에 교차되는 것은 무시무시한 강기였다. 외공의 강렬함은 한표검이 한수 위 인 것 같고 부드러움과 노련함 그리고 내공은 종식검이 위인 것이 뚜렷해 보인다. 먼동이 틀 무렵에야 두 사람의 겨루기가 끝났다.
  무승부. 밤새 기 싸움을 한 두 사람. 전력을 다해 무공을 겨루면서 서로의 진면목을 확인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던가!
  먼저 종식검이 입을 열었다.
  “자네와 내가 힘을 합한다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 되겠지...”
  한표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여부가 있겠소이까. 다만 여러 가지 상황들이...”
  한표검은 말끝을 흐렸다.
  “.......”
  둘이는 한동안 말이 없다. 한표검을 그윽히 바라보던 종식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달 보름날에 다시한번 조우 하는게 어떠신가?”
  한표검은 두손을 합장하고 대금산으로 신형을 날리며 호탕하게 말했다.
  “하!하!핫! 좋소이다. 그땐 선배와 의기투합하는 날이 될 것이라 믿소이다.”

  종식검과 한표검의 은밀한 만남, 그리고 의미 있는 기약이 있은 그 시각.
  산방산 자락에는 거뭇한 땅꺼미가 산 언덕으로 부터 기울어오고 있었다.
  산방산 그림자가 드리워진 간덕천을 한 중년 무사가 산책하고 있다. 풍채 당당한 체구에 벽안의 모습은 가히 한 문파의 종사의 기도를 뿜어내고 있다. 진성율사이다.
  진성의 얼굴에는 깊은 고민이 배어 있었다.
  짙은 노을이 이제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출 즈음 진성이 입을 열었다.
  “현 무림정세를 어떻게 보는가?‘
  “......”
  동행하던 백의 문사는 말이 없다. 백의 문사는 거제무림 사상 최대의 두뇌라고 불리는 ‘천뇌’ 귀곡선생의 수제자인 ‘천리통’ 청산공자였다. 진성의 총사였다.
  “새 판을 짤 가능성이 있는가?”
  “.......”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까. 백의 문사의 입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전음이 흘러 나왔다.
  “율사의 관심은 태상자리 아니오이까?”
  “태산을 오르려는 자, 어찌 뒷동산을 탐하랴...”
  “윤영 태상의 성정으로 봤을 땐 끝까지 갈 것 같소이다.”
  “......”
  “사모는 현재 윤영태상 연루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고, 현 무림법규에는 당해 비무대회  에서만 ‘황금무력공’을 금제하고 있으니...”
  “......”
  “향후 무림정세가 끝을 가늠하기가 힘드오이다.”
  한참동안 초저녁 태백성을 지켜보던 진성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허면,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인가?”
  청산공자의 입에서 미소가 번졌다.
  “주군, 왜 방법이 없겠소이까?”
  “......”
  “정중동 이정제동(靜中動 以靜制動), 타력본원 타면자건(他力本願, 唾面自乾)”
  청산은 진성에게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정(靜)으로써 동(動)을 제압하라고 주문하고 있었다. 덧붙여 얼굴에 침을 뱉으면 저절로 마를때까지 기다리라며 처세에는 각고의 인내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한편, 거제무림 태상전.
  윤영태상이 거처하는 태상전은 고현천 물줄기가 굽어 도는 고현사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는 짙은 검은 운무가 뒤 덮혀 있다. 중원감찰단의 ‘사마척살령(邪魔刺殺令)’이 내려지면서 태상전을 천라지망(天羅地網)으로 에워쌓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평소 윤영태상이 출두하면 방문객으로 북새통을 이루던 태상전이 적막처럼 고요했다.
  윤영태상은 창가에 앉아 독봉산을 쳐다보며 상념에 차 있었다. 가슴속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일고 있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난관을 헤쳐나갈 비책은 정녕 없는것일까. ‘사마척살령(邪魔刺殺令)’이 어디까지 뻗칠까. 그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으음,
   천요하우(天要下雨)
   낭요가인(娘要嫁人)
   유타거(由他去)“
  ‘하늘은 비를 내리려 하고 어미는 시집을 가는구나. 가라고 해라.’ 대륙무림의 2인자 였던 임표가 쿠테타를 모의하다 발각, 러시아 무림으로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은 마오지존이 안타까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말이다. 그랬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막을 수는 없다. 홀어머니가 재가하는 것을 어린자식이 무슨힘으로 막으랴. 윤영태상은 사방이 잿빛하늘로 뒤덮여 활로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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