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제3국인 인도의 관리가 재심한 결과 한국군 2명과 인민군 74명, 중공군 12명 등 도합 88명은 중립국 인도로 귀환되고, 인민군 7,604명은 남한으로, 중공군 1만4,235명은 자유중국(대만)으로 송환되었다.

이상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거제도포로수용소포로들은 크게 세 가지 삶을 선택한 것으로 드러난다. 즉, 첫째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남한의 체제를 선택한 포로들, 둘째는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을 표방하는 북한으로 돌아간 포로들, 셋째는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인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로 구분된다.

거제도포로수용소 포로들의 이상의 세 가지 체제선택 방식에 대한 작품 가운데 북한으로 돌아간 포로들의 삶에 관한 소설은 아직 출현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출현될 것으로 기대되며, 반면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의 삶에 대한 소설과 남한 체제를 선택한 반공석방포로들에 대한 작품들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거제도포로수용소 석방포로 가운데 제3국인 중립국 인도를 선택한 포로들의 삶을 소설화한 작품부터 살펴보자.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제3국인 중립국 인도를 선택한 포로들의 삶과 문학

① 제3국인 중립국 인도를 선택한 거제도포로수용소 석방포로 이명준의 삶 -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

작가 최인훈은 함북 회령 출생으로 1950년 12월 부산으로 피난 온 그의 가족이 목포로 거주지를 옮김에 따라 그곳에서 그는 고등학교를 1년 동안 다니다가 이듬해인 1952년 다시 부산으로 이주하여 전쟁으로 부산에 임시 이전해 있던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그는 대학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는 대학을 중퇴하고 창작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그는 1959년 「자유문학」에 「GREY구락부 전말기」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했다.

1960년 4·19를 맞게 되고, 이를 계기로 화제작 『광장』을 잡지「새벽」(1960년 11월호)에 발표하면서 일약 문제 작가로 떠오른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4·19가 있었던 1960년 그해 11월에 발표된 장편소설 『광장』의 상징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이었지만,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광장』의 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1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분단 문제에 접근한 대표적인 예로 손꼽을 수 있는 이 작품은 민족의 분단을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 최인훈의 출세작이 된『광장』은 작가 최인훈이 북한 공산 치하에서 어린 시절 겪었던 생생한 체험과 6· 25의 경험이 밑바탕을 이룬 작품으로, 주인공 이명준을 포함한 거제도포로수용소의 석방포로들 가운데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제3국인 중립국 인도로 가는 석방포로 이명준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스스로 관념철학자의 달걀로 자처하는 이명준은 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다. 철학의 탑 속에 자신을 가둔 채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는 그는 어떻게 하면 힘껏 살 수 있는지 알지 못해 고민한다.

이명준이 보기에 해방 후 남한의 현실은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은 곳으로 인식된다. 남한의 정치·문화 현실에 대한 그의 비판은 대단히 날카로운 것이지만, 그 텅 빈 광장으로 시민을 모을 나팔수가 되라는 정 선생의 권유에 회의를 표하는 그는 실천론자라기보다 관념론자에 가깝다.

8·15 해방이 되던 그해 이명준의 아버지 이형도는 북으로 월북해 갔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어머니마저 돌아가자 고아가 된 이명준은 아버지의 친구인 영미 아버지 밑에서 몇 해를 지내왔다. 아버지 친구의 딸인 동시에 부르조아 집안의 딸인 영미의 집에서 만난 윤애와 사귀던 중, 그는 뜻하지 않게 독립 투사였던 아버지가 북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제 사찰계 출신 형사에게 시달린다.

그것은 이명준의 아버지 이형도가 ‘박헌영이 밑에서 남로당을 하다가 이북으로’ 넘어간 뒤 근래 대남 방송에 나온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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